2019.11.1 금 18:48
> 뉴스 > 삶과 영성
       
독학으로 읽고 또 읽고 눈물 흘려
[내 영성의 발자취 4] 나를 뻑 가게 한 스승 안병무 선생님과의 만남
2010년 02월 15일 (월) 15:37:17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곽건용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클릭!  

어떤 사람이 변호사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서 아는 사람을 통해 변호사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 변호사는 사무실도 서초동이 아니라 구로동이었고 그가 맡는 사건이 주로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도록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 사람 때문에 그가 맡은 민사 사건은 그로서는 매우 드문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매우 만족했다.

어느 날 그녀가 변호사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물었다. “변호사님은 어떻게 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을 하게 됐나요?” 변호사가 대답했다. “제가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대학 시절에 책을 통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은 분이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아서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녀가 물었다. “그 분은 누군데요?” 변호가가 대답했다.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안병무 선생이란 분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잠시 놀라며 크게 웃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아시는 분인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제가 그분 조캅니다. 안 선생님의 부인이 제 이모님이세요.”

“목사님, 세상에 이런 일도 있더라고요.”라면서 2006년인가 우리 내외와 그녀가 함께 안병무 선생의 묘소에 성묘하러 가던 중에 그녀가 내게 해준 얘기다. 그녀는 미국에 오래 살다가 귀국한 후로 선생님(이 글에서 선생님은 ‘김대중 선생님’이 아니라 ‘안병무 선생님’이다)이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곁에서 일을 도와주었다. 선생님에게 용무가 있으면 일단 이 분을 거쳐야 했다. 나와는 매우 친한 사이고 난 이분 딸 결혼식을 주례했다. 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할 때마다 이 얘기가 생각난다.

   

우면동 자택 서재에서의 고 안병무 선생님의 모습.

난 정신적으로 성장이 늦은 편이다. 말을 비롯해서 뭐든지 남들보다 일찍 해본 적이 없고 늘 남들보다 반 발짝씩 늦었다. 중학교 들어가서 첫 영어시간이었다. 영어 선생님이 칠판에 알파벳을 인쇄체와 필기체로 한 번 좍 쓰더니 “알파벳은 다들 알지?”하곤 바로 “Lesson One. This is a pen. That is a desk.”하고 마구 읽기 시작하는데 난 도무지 어디를 읽는지 몰라서 정신이 혼미해졌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 그야말로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난 알파벳만 늦은 게 아니라 모든 게 늦었다. 10대에 해야 했을 일은 20대에서야 했고 20대에 했어야 할 일은 30대에 했다. 지금도 벌써 끝냈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난 대학시절에 ‘사회학과’를 다니면서 서클활동도 안 했고 데모도 별로 하지 않았다. 물론 남들 나설 때 나도 중간쯤에서 나섰고 덩치 좋다고 교문 돌파할 때면 늘 맨 앞에 섰다가 최루탄 엄청 먹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때도 난 의식이 덜 깨어 있었던 거 같다. 학생운동 열심히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날 좀 이상하게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물론 지금도 남보다 늦는 건 변하지 않았다. 남들이 다 해결한(?) 고민을 난 지금도 끙끙거리면서 하고 있고 남들은 이미 오래 전에 졸업한 짓을 아직까지 더듬거리며 하고 있다. 남들은 이십 대에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오십이 돼서까지 아직도 옳다고 믿고 있다.

내 기억에 대학재학 중 단 한 번도 제대로 개강해서 제대로 종강한 학기가 없었던 것 같다. 박정희 말기와 전두환 초기시절, 교내에 군복 입은 자들이 제 집 마당인 양 돌아다니고 가끔씩 여기저기서 전단이 뿌려지고 짱돌이 허공을 날 때 난 학습하고 토론하고 시위하던 친구들의 중심에 서지 않았고 주변을 맴돌며 건성으로 참여하면서 ‘정말 나는 졸업하고 신학교를 가야 하나?’하는 고민을 했다. 아무도 나더러 신학교 가라 하지 않았고 내 부모님도 ‘아들 하나 점지해주시면 목사 만들겠습니다.’라고 신에게 약속한 적 없다. 그런데 난 왜 내가 좋아서 신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고 신학교를 가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면서 ‘과연 신학교를 가야 하는가?’라고 물었을까? 아마 맘 한 구석엔 그게 내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던지도 모르겠다.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그게 내 길이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20년 동안 목사노릇 하면서 “왜 목사가 됐습니까?”라는 질문 정말 많이 받았다. 목사 노릇을 잘 못해서 그렇게 묻는지, 아니면 목사 같지 않아서인지, 버젓이 서울대학 나온 놈이 왜 목사가 되려고 하나 하는 생각에선지(사실 우리 동문들 중에 목사가 적지 않다), 그것도 아니면 뭐 딴 걸 했으면 더 잘 했을 거 같아서 그런지 좌우간 이 질문 무척 많이 받았다. 그런데 난 이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글쎄, 왜 난 목사가 됐을까?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내 운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것도 아닌데……. 내가 신앙이 남달리 돈독해서 목사가 되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남들에게 너무 신앙에 미치지 말라고 말하곤 한다. 신앙은 없는 듯 있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말이다.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람의 정신과 삶의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드러나지 않아야 좋은 거, 이게 신앙이라고 난 믿는다. 이래저래 난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목사 아니면 제가 뭘 했으면 잘 했을 거 같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으로 슬쩍 피하곤 한다.

지난번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내가 자란 교회는 엄청나게 보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소리 지르며 통성기도하고 방언하고 안수해서 병고치고 하는 소란스런 교회도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충청도 양반 같이 점잖은 교회였다. 난 그런 교회에서 ‘모범생’ 소리 들으며 비교적 평탄하게 교회생활을 한 편이다. 당연히 교회에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정치 얘기 등은 별로 들을 수 없었으므로 다니던 대학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고 하겠다. 하지만 난 그때만 해도 내 교회와 색깔이 다른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저 세상은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라고, 둘은 서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는 일은 세상일은 멀리 하고 이른바 ‘영적인 일’에만 열중하는 걸로 알았다. 그리고 신학교를 간다면 당연히 내 모교회가 속해 있는 교단의 신학교에 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 모교회는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에 속해 있었는데 한국장로교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은 이 교단이 얼마나 특이하게 보수적인 교단인지 알리라. 하지만 내 보기에 이 교단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성에 있지 않고 일관성이 없다는 데 있다. 보수면 확실히 보수여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고 사안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한다. 얘기가 약간 샛길로 빠지지만 요즘 한국에서 <칼을 쳐서 보습을><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 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등의 책을 써서 잘 알려진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가 같은 교회 출신이다. 이 친구는 내가 고딩 때 아끼고 귀여워한(내 말이 아니라 김두식의 말이다) 초딩이었는데 그가 책에서 얘기하는 신앙과 교회에 대한 고민들은 내게도 낯익은 고민들이었다.

좌우간 난 별 고민 없이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갔다. 동시에 그 해(1982년) 1월부터 용산구에 있는 한 교회에서 초딩이들을 지도하는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바로 여기서 이충섭 씨와의 길고도 질긴 인연이 시작됐다. 그때 난 초짜 전도사, 충섭 씨는 공대 1학년 기숙사생으로 교회학교 교사였다.

근데 막상 신학교를 다녀보니 모든 게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최응환 씨가 신학생 만드는 세미너리(seminary)는 곧 시체 묻는 세미터리(cemetery)라는 말을 했던데 이 말이 내겐 그리 틀리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난 학교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거기 더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던 그 학교를 한 학기 만에 접고 난 신학을 독학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신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군복무는 반 년 만에 해치우고 일하던 교회에서는 학교 사정과는 무관하게 즐겁게 일하면서 난 1984년 말까지 만 3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혼자 신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당시에 한글로 나온 그럴듯한 신학 책은 다 읽었던 거 같다. 물론 거짓말 보태서 그렇단 얘기다. 이때 가장 많이, 가장 여러 번 읽었고 가장 많이 밑줄 쳐가며 읽다가 생각에 빠지고 읽다가 눈물 흘린 책이 바로 선생님의 책들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내 착각이겠지만(지난번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양반에겐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가장 사랑받는 제자라고 믿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선생님의 가장 큰 사랑과 기대를 받는 애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독학 3년을 끝내자 신께서 내 엉덩이를 탁 걷어차셨다. 교회에서 나에 대해서 ‘학생들을 의식화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은 흉흉한 소문이 돌더니 급기야 쫓겨나고 말았다. 그때 담임목사는 어떻게 하든지 날 보호하려 했지만 그만 하산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스스로 사직하고 말았다. 이제 제대로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충섭 씨를 비롯한 청춘들과 서너 차례에 걸친 송별주연을 끝으로 용산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고심 끝에 정한 학교가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그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면 고심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해직기간이었고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으므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선택은 버킹검, 이번에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신학교를 택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난 선생님을 학교가 아니라 교회에서 먼저 만났다. 하지만 내가 향린교회(이 교회는 선생님이 세운 교회다)를 다닌 지 한 1년 반 동안은 선생님과 개인적인 만남은커녕 말문을 틀 기회도 없었다. 선생님은 가끔 설교하러 오셨고 난 고딩이들을 지도하는 전도사로 일했는데 워낙 저명하신 분이어서 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내게까지 말을 섞을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것이다. 난 그때 선생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얼마나 고개 숙이고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단언하건대 선생님은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설교자다. 그저 그렇고 그런 설교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내 친구 중에는 이 양반 설교 테이프를 하도 많이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친구도 있다.

그 많은 기막히게 좋은 설교들 중에 날 한 방에 뻑 가게 만든 설교가 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 그대로 옮겨보겠다. “너희 남자 놈의 새끼들, 밖에 나가서는 바람피우고 오입하고 저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다 하면서 집에 와서 아내에게는 정숙하라고? 순종하라고? 웃기고 있네! 근데 여자들이 암만 화도 내보고 눈물로 호소해 봐도 잘 안 되지요? 이제부터는 울지도 말고 호소하지도 마세요. 여러분도 나가서 남자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세요! 바람피우세요! 왜 자기들은 맘대로 하면서 여자들만 안 된데?” 1985년 가을 어느 때였던 거 같다. 그때 장가는커녕 여자 친구조차 없었던 난 이 설교 같지 않으면서 가장 설교 같은 말을 들으면서 하마터면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를 뻔했다. 바로 이거야!

세상엔 불의라는 게 있다. 그것으로 득을 보는 사람도 있고 해를 입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가족이나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세상은 이 불의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것을 없애고 좀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세상은 강자의 폭력에는 너무 관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반면 약자가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그를 욕하지 않는가? ‘쯧쯧, 그래서 무슨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며 말이다. 난 선생님이 정말 여자더러 나가서 바람피우라는 뜻으로 말씀하진 않았다고 본다. 다만 그렇게 행동해도 남자들은 암말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다. 불의를 없애려면 두 가지가 궁극적으로 필요하다. 불의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의 저항과 득을 보는 사람들의 회심, 모두가 필요하다.

사람들 중에는 선생님의 말에 눈살 찌푸릴 사람도 있을 테고 만세를 부르려던 내가 이상해서 ‘저 목사 교회 한 번 나가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하며 혀를 찰 할 분도 있겠지만 그때 솔직한 내 심정이 그랬다. 20대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내가 이번에는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마구 몰려왔다.

같은 해에, 아직 난 선생님과 말 한 마디 섞어보지 못하던 때였는데, 향린교회에 학생운동 하다 감옥에 간 학생이 셋 있었다. 그 이름을 다 말하긴 좀 뭐하고 우리 동문도 한 명 있었는데 김민석 동문이 바로 그다. 교회 청년회에서 이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 참석자의 세 배쯤 되는 전경들이 교회 바깥을 둘러싼 가운데 삼엄한 분위기지만 뜨겁게 열린 기도회에서 설교는 문동환 목사님이 하셨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당부의 말씀 같은 걸 하셨는데 그 말씀이 또 날 뻑 가게 만든 걸작이었다. 요약하면 “기도회도 좋지만 기도만 하고 다 됐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감옥이 무척 춥다. 먹을 거 입을 거 넣어주지 않으면 이 학생들 겨울 못 난다. 그러니 지금 주머니에 갖고 있는 돈 다 내놔라. 한 푼도 빼지 말고 다 내놔라. 그 돈이라도 내놔야 여러분이 아랫목에서 잘 수 있을 거 아닌가. 물론 그것 갖고는 턱도 없지만.” 선생님은 건강하시지 않았다. 거의 평생 병을 달고 사셨다. 감옥생활 경험도 있다. 그런 노 교수가 20대 팔팔한 감옥 간 젊은이를 위해서 주머니를 털자고 거의 눈물로 호소하셨다. 나도 주머니를 탈탈 털어 다 내놨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푸근했다. 난 인간이 시건방져서 누굴 잘 존경하지 않는 편인데 이땐 선생님을 존경하는 맘이 퐁퐁 샘솟듯 솟더라.

이 두 사건을 겪으면서 난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만나길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래도 뭔가 모양이 갖춰진 가운데 만나고 싶었다. 난 인간이 좀 시건방지니까. “제가 선생님 과 후배입니다.”라든가 “선생님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전혀 낯설지 않네요.” 따위의 말로 관계를 트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계기를 만들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도 내가 신뢰하고 따르는 신께서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하긴 그만큼 믿고 따랐으면 이런 정도는 해주셔야지......’는 건방진 생각이고 나름대로는 신의 계획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법 근사하게 선생님과 말문 틀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에 얘기할 그 자리에서 난 처음으로 존경해마지않는 선생님과 드디어 말문을 텄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지금도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그것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를 잘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딱 한 문장이었다.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인정하는 최고의 설교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게 좀 거시기 하지만 어쨌든 난 이 한 마디로 선생님과 의기통합하여 그 후 7-8년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본래 계획은 이번 글로 선생님과의 만남 얘기를 마치려 했는데 편집장께서 내가 그토록 많이 받았던 질문, “왜 목사가 됐습니까?”에 대해서 얘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글이 길어졌다. 선생님에 대한 본격적인 얘기는 다음 글로 미뤄야 하겠다. 글 횟수가 늘어난 것은 전적으로 편집장님 책임이니 허락해주시겠지 뭐. (안병무 2편 To Be Continued)

     관련기사
· 중딩 1년 때 버스 함께 탔던 그 친구...· 친구의 '다른 세상' 깨닫곤 눈물 흘려
· 맥주집서 만난 내 또래 ‘아가씨’에 충격
ⓒ 아크로폴리스타임스(http://www.acropolis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쓰기
이름 비밀번호
제목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현재 0 byte/최대 400byte)
전체기사의견(36)
  저도 너무나 뒤늦게 강국 2010-02-21 22:31:44
댓글을 답니다. 선배님께서 왜 신학교 갈 생각이 들면 반드시 당신께 말하라고 하셨는지 이유가 짐작이 가네요. 이런 소중한 글이 저희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안병무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이 글을 보고 찾아 보니 정말 더 알고 싶어지는 분이네요. 설교집을 사서 봐야겠습니다. 혹시 저같이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나누고 싶은~" 게시판에 제가 찾은 글을 올려 놓겠습니다. 다음 글 고대하겠습니다.
추천0 반대0
(76.XXX.XXX.189)
  철지난 댓글에 대한 응답글 곽건용 2010-02-22 11:45:37
을 쓰려니 열기가 식어서리...... ㅋㅋ 농담입니다. 안 선생님에 대한 글 찾아 올려주시어 감솨합니다. 신학교 운운에 대해 강국 님이 짐작하는 이유는 그 일부이고 사실은 신학교 가려는 사람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려는 겁니다. 왜냐? 강국 님 같이 우수한 자원이 이쪽으로 자꾸 유입되면 가뜩이나 힘든 내 목사 노릇이 더 힘들어질까봐 그럽니다. 이거, 농담 아닙니다. 절대!!!!
추천0 반대0
(71.XXX.XXX.58)
  뒤늦은 회화나무 2010-02-19 23:18:03
댓글입니다. 안병무 선생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대학 2학년(3학년?)때 들었던 부활과 4.19강연이 생각나고요. 라디오 방송을 우연히 듣다가 선생님의 외국 여행 중에 있었던 속옷 세탁 얘기가 왜 그리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네요. 다음 편 기다립니다.
추천0 반대0
(63.XXX.XXX.160)
  철지난 댓글에 대한 응답글 (2) 곽건용 2010-02-22 11:48:47
속옷 세탁 얘기는 저도 모르는 얘긴데요. 글구 선생님이 80년대 말쯤인지 언젠지 심장 수술 받으시느라 남가주에 계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글구 북가주에 있는 Pacific School of Religion이란 학교에서 한 두 학기 강의하신 적도 있었구요. 그래서 제가 여기 온다니까 그때 사귀어 알게 된 분들을 알려주시며 만나보라시더군요. 다음편...... 빨리 써야 할텐데....
추천0 반대0
(71.XXX.XXX.58)
  생생하다고 꼭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봅니다. 회화나무 2010-02-22 23:52:53
독일(? 유럽) 여행 중에 몸이 안좋으셨는지, 호텔방에서 밤늦게 속옷을 세탁하였다고. 갑자기 죽으면 사람들이 더러운 속옷을 볼 것 같다고. 그 일을 전화로 박선생님께 하셨는 모양인데, 그런 생각 말고 건강히 다녀오시라는 얘기를 했다고. 뭐 그런 정도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그 때 들을 때나 지금이나 선생님 말씀의 느낌은 생생한데, 적어 놓고 보니 기억의 잘못은 없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추천0 반대0
(68.XXX.XXX.119)
  82년 같은데, 어느 해인가 회화나무 2010-02-23 00:01:11
안병무 선생님과 함세웅 신부님의 부활과 4.19 강연회에 갔었습니다. 안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골자는 예수는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 같았다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을 때도 하느님께 삶을 갈구하다가 마지막에는 꽥 소리까지 내며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처럼 죽었다고. 그런 힘없고 약한 사람이 부활한다고. 그런 뜻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천0 반대0
(68.XXX.XXX.119)
  착각 볼사리노 2010-02-16 23:00:57
아닌 줄 알면서도 안병욱선생과 착각했습니다.
아니 웬 '목 & 사' 논쟁이 한창입니까?
목사는 目四가 아니었나요?
눈 4개를 가지고 잃은 양 뿐아니라 99마리 양까지 보살피는.
추천0 반대0
(75.XXX.XXX.198)
  제가 눈이 네 개인 건 맞는데... 곽건용 2010-02-17 10:32:05
99 마리 양을커녕 잃은 양 하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거 같아서 영.... 글구 아래 목자와 양의 비유에 대해서 전 이 비유가 한국인에겐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글구 동물만 보면 '남의 살'이라고 하며 먹으려 덤벼들었던 시절과 오늘은 많이 다르다는 데도 절대 동의합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성경이 그쪽 문화권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으니 안 맞아도 '쩝쩝'하고 입맛만 다시는 수밖에는....
추천0 반대0
(99.XXX.XXX.29)
  설교를 잘하는 것이 목사 양민 2010-02-16 13:52:14
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이 원하는 목사상입니다.
목사는 "목"을 하는 사람이지, "설"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설"은 "목"중에 꼭 필요한 것이고, 잘한다기 보다는, 제대로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목"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것 보다 제대로 사는 것이고, 그 때만이 제대로 한 "설"이
제 몫을 하게 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추천0 반대0
(99.XXX.XXX.157)
  요즘 신자들이 원하는 목사는 곽건용 2010-02-16 15:38:39
연기력 훌륭한 배우인 거 같습니다. 당장 지금 맘 편하게 만들어주면 그뿐이죠. 근데, 어쩌요? 전 목사가 할 일은 신자들 맘 불편하게 만드는 거라고 믿거든요. 뭐 잘못된 거는 없나... 하고 자꾸 자기 생활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거, 이것이 목사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의 '소위'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거시기하게 말하면 마냥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지 말고 '엉덩이 들썩거리게 만드는 일' 말입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29)
  아멘, 아멘! 나도 어린양 2010-02-16 15:03:36
입니다
추천0 반대0
(12.XXX.XXX.91)
  양민님의 설교론에 목사님들은 어린양 2010-02-16 14:16:22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양민님은 혹시 한자가 기를 양, 백성 민 아닌가요?
그렇다면 정치를 하셨어야 할 분인데...지금 설교론을 그대로 육성으로 들으면 목사 안수를 앞둔 신학교 졸업생들에 대한 일갈하시는 표정이 역력한데, 그대로 무대만 옮기면 정치인의 육성이 되는군요. 올해 6월 한국 지방선거인데 어디 가실만한데 없나요?
추천0 반대0
(66.XXX.XXX.50)
  어린양의 말씀에 곽건용 2010-02-16 15:42:47
공감합니다. 근데 양민 님은 정치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이분이 하는 말은 안 듣고 얼굴만 쳐다보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제가 보기엔 목사도 문제지만 교인들도 문젭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사만 따라 가거나 앞에선 암말 않다가 뒤에서만... 뭐가 무서워서?? 교회는 목사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인이예요. 이러면 '교회가 왜 교인 것인가? 주님의 것이지...'라고 말하는 사람에겐 유구무언이올시다.
추천0 반대0
(99.XXX.XXX.29)
  양을 기르는 방법 양민 2010-02-16 18:06:01
양이라고 다 같지 않습니다. 모험심 많은 양은 가시덤불 벼랑길에도 다니면서 자신의 살길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양은 겁이 많아 절대로 주인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양이 되었건, 양을 바보로 만들어서 데리고 있는 양치기의 모습이 요즈음 양목장아닙니까? 전연 담밖에서는 살 수가 없는 바보. 자신의 털이 언제 깎이는 지, 이게 잘 하는 짓인지 모르는 양, 그러면서 좀 더 주인 옆에 있으려하고...그게 뭡니까?
추천0 반대0
(99.XXX.XXX.157)
  양을 기르는 방법(2) 양민 2010-02-16 18:12:06
그렇게 기를 거면, 애급에서 그냥 Happy하게 사는 것과 뭐 그리 다를까요?
양과 목자, 사실 저는 이 두 단어가 썩 훌륭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단어이기는 한데 한국인에게는 전연 잘못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서요.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양을 지키던 유대인들에게 목자의 사랑을 양과 목자라는 어구에서 피부에 느끼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목장주인과 털대는 바보양들의 느낌이 더욱 강한 것 같아요.
추천0 반대0
(99.XXX.XXX.157)
  쓰다보니 길어진 양 키우는 법(3) 양민 2010-02-16 18:20:58
순종하는 바보양떼, 떼지어 집단이기주의, 뭐 양들이 생각이 있나요. 목자가 양들을 (1)긍정적 사고라는 허울에 최면하거나, (2)꾸준한 죄인 신드롬에 빠뜨려 왔다갔다 하게 하면 안되지요.
그러니 평생을 다녀도 어제나 오늘이나 불변하지요. 진정한 목자는, 목자 유고시에 양이 목자가 되도록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발전하도록 키우는 자 입니다. 양을 목자로 만들려면, 목자나 양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전재없이 불가능합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157)
  장중한 메시지는 공감, 여기선 배꼽 웃은남 2010-02-16 18:42:16
특히 세번째 제목에 '쓰다보니 길어진 양키우는 법'에서 배꼽 빠질 뻔 했다는.ㅎㅎ
제가 뵌 적은 없는 분인 것 같은데 너무 귀여우실 것 같아요.
추천0 반대0
(66.XXX.XXX.50)
  이거 장중해 지면 안돼는데 2010-02-16 19:15:12
못짧아서 죄송했어유..
추천0 반대0
(99.XXX.XXX.157)
  목자와 어린 양 이충섭 2010-02-16 21:22:48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는 비유인데요. 왜냐 하면...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은 맞겠지만, 결국 잡아먹으려고 하는... 따라서 기독교에서 이 비유를 애용할 때마다 저는 남몰래 섬짓함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추천0 반대0
(98.XXX.XXX.95)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의 단초를 저는 이원영 2010-02-15 18:59:47
"세상은 강자의 폭력에는 너무 관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반면 약자가 온몸으로 불의에 저항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그를 욕하지 않는가?"라는 문장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충섭님과의 길고 끈질긴 인연이 그랬군요....촉촉한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추천0 반대0
(75.XXX.XXX.27)
  세상이 강자의 폭력에 곽건용 2010-02-16 10:12:42
너무 관대하다고 말하면 무슨 이념이 어쩌고 저쩌고 하데요. 그게 이념과 무슨 상관인지 전 모르겠고 또 이념이 그런거라면 이념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은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했던 거 같은데 '목사 노릇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 다잡았을 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네요. 편집장님, 글이 한두 회 더 길어져도 괜찮은 거죠? 공개적으로 청탁했으니 안 된다고는 안 하시겠지?
추천0 반대0
(71.XXX.XXX.58)
  길어지다니요? 다행입니다. 워낭 2010-02-16 10:38:15
이렇게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쉽게 끝나는 것 보다 편한대로 맘껏 쓰십시오. 독자들이 고만 쓰라고 할 때까지 쓰셔도 됩니다. ㅎㅎ.
추천0 반대0
(66.XXX.XXX.50)
  나를 뻑가게 한 몇 안되는 목사 양민 2010-02-15 11:44:36
인생에 있어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는 그런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참 행운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을 찾을 수 있는 것도 훌륭입니다.
만날 수 없었어도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뻑가게 하고 인연을 맺을 선생님을 찾아 좋았듯이,
우연을 가장한 모임에서 곽건용님을 만나 알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157)
  뻑 가서 지금은 곽건용 2010-02-16 10:07:57
어디 계시기에 요즘 뵙기가 쉽지 않은 겁니까? 왜 영화도 보러 올 거면서 아직 댓글도 안 달고.... 코 앞에서 하는데. 글구 '우연을 가장한 모임'은 뭐였더라???
추천0 반대0
(71.XXX.XXX.58)
  곽건용님도 언젠가는 (이미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이경훈 2010-02-15 08:55:34
마치 곽건용님에게 그분이 의미있었던 것처럼, 의미있는 존재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추천0 반대0
(75.XXX.XXX.83)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곽건용 2010-02-16 10:00:31
저도 남에게 그런 의미있는 인간이 되기를... 그 '의미'의 내용은 좀 다르지만 글에서 언급한 김두식 님이 한 4-5년 전에 드닷없이 여기로 날 찾아왔습니다. 난 이름도 가물가물했죠. 근데 만나보니 얼굴이 기억나더군요. 글구 그 친구가 옛날 얘기를 하는데 제가 자기를 그렇게 귀여워했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두식 군 누나가 제 1년 아래였습니다. 아마 누나 때문에 귀여워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58)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0-02-15 19:48:19
많은 사람들에게 Inspiration이 되고 A Breath of Fresh Air가 되고 계십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110)
  하긴 가물에 콩 나듯이긴 하지만 곽건용 2010-02-16 10:05:12
제 글이나 설교 같은 것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니까 가끔 이메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많이 갖다 쓰는데 그래도 될까요?' 뭐 이런 얘긴데... 이미 갖다 써놓고서 왜 사후에 이런 메일을 쓰는지는 모르지만 '네, 맘대로 하세요. 그것들은 저작권 없습니다.' 라고 답하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데요. 나야 뭐 남들이 써주면 고맙지요. A Breath of Fresh Air... 고맙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58)
  당시 패션 이충섭 2010-02-15 08:16:30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고 그 사람의 정신과 삶의 제일 밑바닥에 깔려 있어서 드러나지 않아야 좋은 거, 이게 신앙"... 제겐 오늘의 한 문장입니다. 훌륭한 스승님과의 좋은 인연을 그렇게 맺으셨군요.

곽건용님을 처음 만났을 당시, 많이 입었던 교련복, 때도 안 타고 편하고 멋낼 옷도 없어..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군사문화의 개인적 피해 사례 가운데 하나네요. 그 청춘에 그 칙칙한...
추천0 반대0
(99.XXX.XXX.225)
  아, 교련복.... 곽건용 2010-02-16 09:56:51
뭐 시골에서 올라와 기숙사 생활하는 청춘이 그땐 다 그렇지 않았나요? 칙칙한 교련복에, 난 신의 아들로 방위하느라 머리빡빡 깍고... 충섭 님 아내 수경 님이 내가 조폭 같았다니 않습니까. 내 스승님과의 진짜 인연 얘긴 다음회에 나옵니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추천0 반대0
(71.XXX.XXX.58)
  어떤 상황에서 이충섭 2010-02-16 12:05:35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를 잘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딱 한 문장을 말씀하신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라면 틀림없이 “선생님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라고 했을 것 같네요. 안병무 선생님이야 그러시지 않겠지만, 제가 저처럼 얘기하며 말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한다는 사람 많거든. 근디?' 할 것 같지만서두...
추천0 반대0
(99.XXX.XXX.225)
  충섭 님 글과는 상관없지만 곽건용 2010-02-16 15:35:06
제가 선생님께 별 생각없이 얘기했다가 불호령 들은 적이 적지 않습니다. ㅎㅎ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선생님은 참 다정다감하셨지요.
추천0 반대0
(99.XXX.XXX.29)
  계속해서 곽건용 2010-02-16 09:54:06
는 아닌데 이상하게 그렇데요. 내가 신약을 전공하지 않아서 사실 직접 읽는 것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주워듣는 게 많은데 그들이 이 양반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읽어서 돈 안 되는 책도 많이 읽고... 그 와중에 언제 노랠 부르고 피아노는 치고 춤을 추는지 원...
추천0 반대0
(71.XXX.XXX.58)
  제게 박수 받고 싶으시면 곽건용 2010-02-16 09:49:54
담배를 끊이심이 좋은 줄 아뢰오. 물론 응환 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ㅎㅎ 그대가 오래 살아야 나도 재미있게 살 수 있을 테니까.... 아, 요즘 응환 님 없어 좀 심심하다. 골치 아픈 질문하는 사람 없어서... ㅋㅋ 잘 지내시우. Bart Ehrman, 이 양반 참 재미있는 분입니다. 책도 무지 많이 쓰고 강연 디비디도 참 많은데 이상하게 신학계에선 좀 이방인 취급 받는 거 같더군요. 하지만 이 양반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추천0 반대0
(71.XXX.XXX.58)
  안병무 교수님 오달 2010-02-15 03:33:43
많이 듣던 존함인데, 그 제자를 통해 간접적 가르침을 듣네요.
청년 곽건용의 정신 성장사 잘 읽고 있습니다.
추천0 반대0
(68.XXX.XXX.141)
  선생님은 학문적으로뿐 아니라 곽건용 2010-02-16 09:45:46
인격적으로도 절로 존경이 가는 분이었습니다. 참 따뜻하고 뜨겁고 열정적이고 또 엄격하고 냉정할 때는 한없이 엄격하고 다른 사람들을 잘 배려하는 분이었지요. 덕분에 그나마 제가 딴맘 못 먹습니다. ^^
추천0 반대0
(71.XXX.XXX.58)
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3600 Wilshire Blvd., #1214 LA, CA, 90010, USA|Tel 1-818-744-100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경훈
Copyright since 2009 by The Acropolis Time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Editor@acropolis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