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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또는 회의(懷疑)
곽건용의 톡톡 튀는 이야기
2009년 10월 23일 (금) 00:21:13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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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남다른 친절 때문에 생긴 문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섯 개 부문에서 후보를 올렸던 영화 《다우트 Doubt》는 등장인물도 몇 명 안 되고 스토리도 비교적 단순하지만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심각하고 심층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두 명의 아카데미 여자 조연상 후보를 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한 영화가 같은 부문에서 두 명의 후보자를 내는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그 중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103분짜리 영화에서 겨우 10분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후보가 됐습니다. 이 정도면 그녀가 얼마나 연기를 잘 했는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때는 케네디가 암살당한 이듬해인 1964년, 뉴욕 브롱스 지역의 가톨릭학교인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에서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는 교육과 행정 모든 부문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그녀는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게 믿는 전통적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을 휩쓴 변화와 민권운동의 바람은 성 니콜라스 학교도 비껴가지 않아 그 해에 첫 흑인 학생 도널드가 입학합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첫 흑인학생이었던 도널드의 학교생활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활기 넘치고 자유분방한 ‘우리들의 신부님’ 플린 신부는 그런 도널드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가 공포와 처벌로 위계질서를 유지돼서는 안 되고 직접 신도들을 찾아가고 손을 내밀어 신도들과 친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부입니다. 플린 신부는 첫 흑인학생인 도널드를 주목하고 그가 당하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를 도와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편 역사를 가르치는 제임스 수녀는 순진무구하고 성실한 교사입니다. 그녀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좋게 생각해왔지만 작은 사건 때문에 신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수업 도중에 플린 신부가 도널드를 사제관으로 불렀는데 거기 다녀온 도널드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고 그의 입에서 포도주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짓궂은 학생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도널드를 플린 신부가 껴안아주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임스 수녀는 고민 끝에 이를 교장 수녀에게 얘기했습니다. 얘기를 들은 교장 수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이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평소에도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신부의 죄를 밝혀내서 그를 학교에서 쫓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신부가 아동성추행이나 그에 근사한 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몇 가지 의심스런 정황과 그녀의 근거 없는 확신이 전부였습니다.

이성과 감정이 대립한다면 어느 편이 승리하겠냐는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일까요? 파스칼은, 사람은 묘한 존재여서 이성적으로 증명된 것보다는 감정이 흘러가는 쪽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 유용한 수단은 ‘증거’나 ‘증명’이 전부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믿는 것들 중에 ‘증명된 진리’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증명은 오직 이성만을 설득하지만 ‘습관’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신뢰받는 증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가슴 속에 자리 잡은 ‘의심’이란 괴물

플린 신부는 자기가 도널드에게 포도주를 준 것이 아니라 도널드가 자기 몰래 마셨고 그것이 밝혀지면 그를 복사(alter boy)직에서 내쫓아야 하기 때문에 밝히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임스 수녀는 안도하며 신부의 말을 믿지만 알로이시스 수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뭘 근거로 신부의 말을 믿지 않느냐는 제임스 수녀의 질문에 교장 수녀는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Experience!” 그녀는 플린 신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영리하고 거짓말을 잘 하는지 자기는 잘 안다고 말합니다. 역시 파스칼이 옳았습니다. ‘습관’과 ‘경험’은 ‘증명’보다 더 강력한 증거 역할을 했습니다.

교장 수녀도 제임스 수녀도, 그 누구도 직접 도널드를 불러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플린 신부도 교장 수녀에게 밝힐 수 없는 사적인 얘기들이 있다면서 모든 얘기를 해주지는 않습니다. 어느 날 교장 수녀는 도널드의 어머니 밀러 부인을 만납니다. 이 밀러 부인이 바로 10분 나오고 조연상 후보에 오른 바이올라 데이비스입니다. 밀러 부인은 도널드가 남편에게 매 맞으면서 살고 있고 아무도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신부가 그를 도와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기만 한다면 설령 그의 행위에 부적절한 면이 있더라도 문제 삼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기 아들에게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고도 말합니다. 밀러 부인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졸업하는 6월까지 아무 일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에는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가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장 수녀는 이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임스 수녀는 병중에 있는 형제를 만나려고 반쯤은 도피성 여행을 떠났고 그 사이에 플린 신부는 다른 교구로 옮겨갔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여행에서 돌아온 제임스 수녀와 교장 수녀가 성탄절 직전 추운 교정 벤치에 앉아 얘기하는 장면입니다. 교장 수녀는 플린 신부가 더 좋은 학교로 ‘영전’(promotion)해 갔다고 말합니다. 그간의 사정을 교구 윗사람들에게 얘기했지만 그들은 교장 수녀의 말을 믿지 않더란 것입니다. 그럼 왜 플린 신부가 딴 데로 갔냐고 묻자 교장 수녀는 플린 신부가 전에 일했던 교회에 전화해서 그의 이전 행적을 알아냈고 그것으로 압력을 가해 신부를 내쫓았다고 했습니다. 제임스 수녀가 “그러면 마침내 당신은 신부의 잘못을 입증했군요!”라고 말하자 교장 수녀는 사실은 그런 전화를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제임스 수녀는 이 말을 듣고 당황합니다. 교장 수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제임스 수녀가 말하자 교장 수녀는 자기가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신부가 사임한 것을 보면 자기가 옳았음이 입증됐다고 말합니다. 그가 사임한 것은 그가 자기 잘못을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지요.

하지만 알로이시스 수녀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자기 가슴 속에 이전에는 없던 괴물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의심’(doubt)이란 괴물이었습니다. 교장 수녀는 “당신이 거짓말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어요.”라고 말한 제임스 수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을 추궁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거든. In the pursuit of wrong doing, one steps away from God. Of course there is a price.” 이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교장 수녀는 단호하고 자신만만합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그녀는 갑자기 흐느끼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 이 장면은 왜 메릴 스트립이 대단한 배우인지를 확인하게 하는 명장면입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화는 ‘저 들밖에 한 밤중에...’ 캐럴이 오르간 연주로 울리며 끝납니다.

의심과 확신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영화가 이미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으므로 저는 몇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윽박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도 성령도 성경도 교회도, 심지어 목사나 신부가 하는 말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의심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적이요 악마의 유혹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전통과 교리를 무조건 믿고 따르는 시대가 아닙니다. 상식과 양식,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 책임이 전제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전통주의자들이 아무리 ‘아 옛날이여.......’를 외쳐도 세상은 계몽주의 이전 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냥 믿지 말고 생각해보고 정말 그런지를 따져본 다음에 믿어야 하고,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그 믿는 것의 내용과 믿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해봐야 합니다. 뭐든지 무조건 믿지 말고 때로는 의심도 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차례 이 강단에서 생각 좀 하면서 믿자고 역설했고 우리 신앙에 대해서도 아무리 자명해 보여도 때로는 의심하고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성찰도 해보고 의심도 해본 다음에 선택하고 믿게 됐으면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났습니까? 생각과 의심과 성찰의 과정을 거쳤으면 그 다음에는 확실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한 선택과 믿음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물음은, 어떤 일에 대해서 선택도 하고 믿기도 하고 의심도 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과연 믿을만한 존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나는 과연 믿을만한 존재인가? 반대로 어떤 일에 대해 의심하는 나는 정말 믿을만한 존재인가? 알로이시스 수녀가 영화 마지막에서 흐느끼며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라고 절규했을 때 영화는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가 주는 대답은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입니다. 나는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란 얘기지요. 저는 교장 수녀의 의심은 자기가 믿고 있던 내용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의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심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의심은 많은 경우에 필요합니다. 의심은 과학의 아버지입니다. 과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의 아버지는 의심이고 더 나아가서 모든 정신활동의 뿌리는 의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정신활동은 멈춰버립니다. 의심은 신앙에도 필요합니다. 의심은 확신 못지않게 나를 진리 및 하나님과 묶어주는 끈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은 신앙이나 신념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더욱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예수의 못자국과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절대로 예수의 부활을 못 믿겠다던 도마는 그런 의심의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확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의심’과 ‘확신’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의심과 확신은 동전의 양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은 불완전한 정보와 자신에 대한 불신에서 옵니다. 의심은 자기가 갖고 있는 정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믿거나 의심하는 자신을 완전히 믿을 수 없을 때도 생깁니다. 한편 확신은 많은 경우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데서 옵니다. 확신은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오만의 산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옵니다. 자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입니다. 의심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데서 온다면 확신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플린 신부는 자기를 의심하며 몰아붙이는 교장 수녀에게 “의심은 감정(emotion)일 뿐이지 사실(fact)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플린 신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의심은 감정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확신도 감정일 따름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확신이 사실이라고 믿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의심과 확신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동시에 확신하면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관객에게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 중에 누가 옳은지를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제가 누구를 선택했을 것 같습니까? 처음에 제 선택은 당연히 플린 신부였습니다. 그와 저는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당연히 플린 신부 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니 그 선택이 그리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둘 중 그 누구도 선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도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가 됐습니다.

영화에서 플린 신부는 자기를 몰아붙이는 교장 수녀에게 “당신은 동정심도 없나? 당신의 동정심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교장 수녀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베풀 동정심 같은 것은 내게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장 수녀에게는 차디찬 냉기가 느껴집니다. 동정심은 영어로 ‘compassion’입니다. 이 말은 ‘열정 passion’을 ‘같이 com’ 느낀다는 뜻입니다. 제가 플린 신부를 의심하기 시작한 대목이 바로 여기입니다.

신부 말대로 교장 수녀에게는 동정심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정말 냉정하고 차갑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렇습니다. 플린 신부의 눈에 그녀는 사람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없고 원칙만 고수하려는 냉혈한(冷血漢)일 뿐입니다. 하지만 플린 신부는 어떻습니까? 그는 과연 도널드에게 동정심(compassion)을 느껴서 그를 도왔던 것일까? 그렇게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그 외의 다른 행적에서는 또 다른 면이 보입니다. 그녀는 교장 수녀와 갈등하는 와중에 미사 강론에서 교장 수녀를 가차 없이 비난하고 까댑니다. 공적인 미사의 강론에서 말입니다.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이 사실을 모를 수 있지만 적어도 교장 수녀 본인과 제임스 수녀는 강론의 숨은 뜻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강론에서 근거 없는 ‘가십’의 피해에 대해 얘기하면서 교장 수녀를 까댔지만 신부들끼리 모여 있을 때는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가십을 해댑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어려운 처지에 몰리자 상부에 얘기해서 더 좋은 곳으로 가버립니다. 저는 이런 플린 신부의 행위에서 그 어떤 ‘동정심’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둘 모두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의심과 확신은 결국은 감정입니다. 그것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태도가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의심이든 확신이든 어차피 사실이 아니므로 크게 마음 쓰지 말고 되는대로 살자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니 그저 적당히 시류에 따라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시니컬한 태도 말입니다. 또 하나는, 의심을 해도 뜨겁고 화끈하게 하고 확신을 해도 모든 것을 바쳐서 뜨겁게 믿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확실한 것은 없다지만 지금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는, 비록 나중에 그 확신이 깨질지라도 뜨겁게 투신하며 살아가는 길 말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으니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아무 것도 절대적으로 부정하지 말고 뜨뜻미지근하게 살아가는 길과, 세상 모든 일이 불확실하고 나도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에 최선을 다해 투신하며 살아가는 길,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알고 보니 잘못이라고 판명이 난다면 그때 울고불고 가슴을 찢으며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옳다고 믿는 삶을 뜨겁게 살아가는 길,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과 확신이 동전의 양면이기에 의심도 확신도 하지 않으면서 냉랭하게 사는 길과 의심과 확신이 동전의 양면인줄은 알지만 뜨겁게 의심하고 동시에 뜨겁게 확신하면서 매사에 열정적으로 사는 길, 이 둘 중 하나를 우리는 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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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21)
  그런데 문제는 최강국 2009-10-31 21:43:20
무엇을 붙잡고 울어도 풀어지지 않고
시원해지지 않는, 그 찝찝함이,
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이었지요.
"뜨겁게 의심하고 동시에 뜨겁게 확신하면서
매사에 열정적으로 사는 길"
이렇게 좋은 화두를 끌어 내 주신
곽 선배님의 좋은 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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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XXX.XXX.44)
  영화를 보다보면 최강국 2009-10-31 21:38:40
가끔 좀 답답해서 몸과 마음을 비비 꼬이게 만든 다음
마지막에 한방에 보내버리는 놈들이 있습니다.
Doubt는 제가 Netflix를 끊기 전 마지막으로 본 영화였는데
알로이시스 수녀의 캐릭터에 좀 짜증이 나던 참에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크게 한방 먹었지요.
나오는 인물마다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하고
원작이 연극이어서인지 구성도 흠잡을 때 없었습니다만
보고 나서의 그 눈물 흘리게 만드는 찝찝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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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XXX.XXX.44)
  10월모임에 나오시면 켈2응 2009-10-28 21:08:39
가르쳐 주~지(요)!

저 어지러워요, 스핀은 이제 그만.
매우 단순한 얘기를 어렵게 푸시니 뭔가 더 만들어야 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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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0)
  글타면 응2켈 2009-10-28 20:43:39
"나보다 훨씬 강한 그 무엇 --- (를) 인정하지 않으면 힘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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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XXX.XXX.99)
  의심하는 방법! 김판건 2009-10-26 12:23:32
아주 좋은 의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제에 대한 의심입니다. 어떤 말이나 글이나 대부분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를 타파하고 의심해 보십시오. 가끔은 전제가 저의 우물을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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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XXX.XXX.5)
  존재에 대한 인식 켈리 2 응환 2009-10-26 08:00:44
나보다 훨씬 강한 것이 필요하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리고 '강하다'는 표현이 Super Hero같은 물리적인 힘만을 야기하지는 않지요.
응환님의 비유와 같이 저는 compassion을 포함한 훨씬 더 포괄적인 맥락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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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0)
  의심과 확신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인식 최응환 2009-10-25 22:13:04
아주 재미있고 뜻깊은 관찰이군요. 확신 뒤에는 항상 의심이 숨어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의심이 뒷받침되지 않은 확신은 편견이나 고집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켈리님, 왜 나보다 훨씬 강한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시나요? 예수님의 위대성은 강한 파워가 아니라 인간적인 compassion이 아니었을까요?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이 엄마가 힘이 세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추천0 반대0
(24.XXX.XXX.87)
  의심은 확신의 도구이며 과정 켈리 2009-10-25 09:49:38
의심이 많을 수록 더 연구하고 세심히 관찰하게 되고, 그러면서 본인의 의심이 틀렸음을 확인하게 될 때마다 조금씩 확신은 더 강해지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종교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강한 그 무엇, 천지를 창조한 그 존재 자체부터를 인정하지 않으면 힘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죽을것 같은 힘든 상황이 왔을 때야 붙들어 보게되는 마지막 희망이 되던가.
건용님의 글은 역시 주일날 읽어야 쏙쏙 들어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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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0)
  선택과 실천이 정답 3 이상대 2009-10-25 09:00:41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 고통, 자유가 주는 형벌에 처해 있다고나할까. 하지만 저는 신의 존재(무엇ㅓ으로 해석하든)는 믿습니다.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이 세상에 던저진 존재는 아니라고 믿기에. 믿음의 DNA를 타고난 분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말씀의 요지는 먼저 선택과 실천을 하라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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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7)
  선택과 실천이 정답 2 이상대 2009-10-25 08:58:35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도록 강요 당하죠. 특히 교회라는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을 생각해볼때. 제가 교회에 나가면서도 느꼈던 갈등의 하나가 교회가 나를 규격화하고 강요하는 하나의 권력으로 느껴진 점이죠. 도저히 의심과 확신중 한곳에 온전히 설수 없는 성격상의 기질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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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7)
  선택과 실천이 정답 이상대 2009-10-25 08:56:34
'아크로는 재미없다' 라고 하면 문법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틀린 말이죠.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는 내용적으로도 맞는 말일 수가 있잖아요. 그러나 이 각자의 확신도 처한 상황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즉 진리라고 믿는 것도 주관적 해석에 따라 달라 지는 상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추천0 반대0
(76.XXX.XXX.17)
  미지근한 건 어찌 워낭 to 현림 2009-10-25 00:51:08
나와 비스므리 허네요. 필자는 뜨겁게 투철하게 살라고 지도를 주신 것 같은데 독자들이 영 결심을 못하네요. 언젠간 곽건용님의 추상같은 메시지가 가슴에 팍 꽂힐 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추천0 반대0
(75.XXX.XXX.127)
  선택과 실천 이 현림 2009-10-24 15:07:15
옳다고는 믿지만 뜨겁게 투신하며 살 수 없는 전 용서가 안되나요?
선배님 교회에 꼭한번 가보고 싶어요.지금 봉사하는 교회에서 짤리면 매주 나갈 수도 있겠구요.
추천1 반대1
(67.XXX.XXX.146)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볼사리노 2009-10-24 11:45:03
아멘입니다. A-Men! (곽동문 죄송!, 하느님 죄송)
이번 일요일 이것 고해성사해야하나?
그리고 기로에 서서는 김수희 전용입니다.
추천1 반대1
(71.XXX.XXX.218)
  아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면서... 양민 2009-10-23 20:05:51
좋은 말씀입니다.
의심은 진실을 쫒는 파수꾼이요
믿음은 희망을 쫒는 전도사라
진실은 정의를 향한 통로요
희망은 행복으로 이끄는 왕도
진리요 생명이라는 신의 모습뒤엔
믿으라 소망하라는 말씀 앞엔
실천으로 보인 것은 용서하기 위한 사랑
정의와 사랑은 양극이면서 하나
의심이 내 이성의 결론이라면, 믿음은 내 마음의 결단
의심없이 믿거나 믿음없이 무관심한 자가 되기보단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고민하기를 선택하겠다.
추천1 반대1
(99.XXX.XXX.175)
  편집장님의 엄명이 있어서 김 학천 2009-10-23 19:50:04
나도 한마디.
의심은 우리 인간의 전유물이다’라고 한 그리스 신화가 새삼스럽지 않다.
의심으로 시작한 도마의 말, '내주님, 내 하느님'
전세계에 오늘날까지.
추천1 반대1
(75.XXX.XXX.198)
  아, 이제 다 읽었다... 이경훈 2009-10-23 13:01:48
그런데, 주말에 한번 더 읽어봐야할 것같습니다. 쩝쩝..
추천1 반대1
(75.XXX.XXX.83)
  의심과 확신 김종하 2009-10-23 11:37:57
곽 건용님 말씀에는 큰 울림 뿐 아니라
건 빵의 고소함, 건포도의 달콤함, 건어물의 쫄깃함까지...
용 서하세요. (에휴~ 이 3행시의 pressure란...)
추천1 반대1
(12.XXX.XXX.91)
  불교적인 화두 김지영 2009-10-22 22:55:46
의심하라
상당히 불교적 화두로 들립니다.
목사님 말씀으로 듣지 좋다는 뜻입니다.
추천1 반대1
(99.XXX.XXX.230)
  질문있습니다. 피터 장 2009-10-22 12:15:16
의심과 확신이 동전의 양면이면, 불신은 어디에 서게 되는지요. 예로서 "플린신부님 말씀은 못 믿어"라고 하면, 이는 불신하는 의심입니까, 아니면 불신이라는 확신입니까? 저 자신의 언어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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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울림이 있는 글 이원영 2009-10-22 10:48:18
입니다. 의심을 하지 않으면 정신활동이 정지된다, 확신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데서 온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산기슭과 중턱과 정상에서 각각 보이는 것만 전부라고 말하는 확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시 한번 겸손의 중요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두개중에 택하는 건, 어렵네요. 저는 뜨듯 미지근한 쪽 같은데...필자님이 원하는 답이 아닐 것 같아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요..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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