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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묻거든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2009년 09월 18일 (금) 23:40:27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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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쓰리 쿠션으로 보내는 모스 부호

누가 여러분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김상용 시인은 <南으로 窓을 내겠소>라는 시에서 ‘왜 사냐건 / 웃지요.’라고 노래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었을 때 그저 웃겠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시인의 생각을 알듯 말듯 합니다. 하지만 시인의 뜻이 무엇이든 시를 읽는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읽고 나름대로 자기 대답을 내놓으면 그뿐일 터이니 시인의 뜻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 길지만 어제 신문에서 읽은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내용이 좀 쓸쓸하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습니다.

수십 년 만에 만난 늙수그레한 동창생 친구가 글쓴이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사냐.” “응, 세검정.” “개인주택이냐, 아파트냐?” “주택이야.” “몇 평인데?” “응, 뭐 00평….” “거기 요즘 평당 천만 원쯤 가냐?” “아마도.” 말은 거기서 끊어집니다. 오랜만에 만난 또 다른 친구가 안부를 묻습니다. “애들이 셋이랬지? 뭐하고들 사냐?” “뭐 큰놈은 연극쟁이고 딸은 디자인을 전공해서 ….” “사위는?” “회사원이지.” 그 친구는 마음이 놓인 얼굴로 “우리 큰놈은 사법연수생인데 요즘 판검사 되기도 어렵고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앉자니 전관예우 혜택도 못 볼 거고, 걱정이 태산이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지만 느긋한 눈빛이라 글쓴이는 토를 달지 않았답니다. 역시 또 수십 년 만에 만난 다른 친구가 안부를 묻습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 “뭐, 그럭저럭….” “다행이다. 난 허리가 좀 안 좋았는데 수영과 골프로 고쳤어. 홍삼 먹어라.” “홍삼은 왜?” “소양인이라면 홍삼보다 00이 나을라나.” 친구의 입에서 생전 들어보지 못한 건강식품 이름들이 줄줄이 엮여 나와 글쓴이는 기가 질려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내가 어떤 꽃나무를 좋아하고 좁은 뜰에 무엇을 심었으며 그 중의 무슨 나무가 시름시름해서 요즘 고민이라는 말을 털어놓고 싶었고, ‘자식’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큰애가 연출한 연극작품들의 경향에 대해 토론하고 싶었으며, ‘건강’으로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에겐 자기 세대 사람들이 삶의 유한함에서 느끼는 강박과 허무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번번이 무산되었답니다. 나이를 먹으면 친구들과 만나 우의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낙 중 하나라고 배웠는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노년을 어찌 보낼지 앞이 캄캄했답니다. 예전엔 만나기만 하면 밤새 할 말이 차고 넘치던 친구들인데 아무리 세월이 무섭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리도 뚫고 들어가 소통할 말이 없단 말인가? 하기야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가족들과도 때로는 말문이 막히고 이웃들은 만나도 잘 나가야 신문가십성 대화 정도에 맴돌기 일쑤고 심지어 동료 작가들을 만날 때도 개그맨들 잡담하듯 말허리를 서로 잇고 거짓말 반 참말 반으로 웃다가 끊어진 다리 같이 처치 곤란한 어색한 침묵과 맞닥뜨린답니다. 명색이 작가들인데 문학 얘기는 금기가 된 지 오래랍니다. 그런 날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헛헛하기 이를 데 없어 발이 꼭 허방을 짚은 것 같다 했습니다.

그럴 때 글쓴이는 차라리 모스 부호를 두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자주 사람들보다 우주가 훨씬 가깝게 느껴진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뻔한 개그에 의례적으로 웃고 실질에 도움도 안 되는 몇몇 정보를 주고받는 체 하다가 잔뜩 지쳐서 돌아오면 그는 깊은 밤 혼자 앉아 우주를 향해 자기의 상처와 고독과 남은 꿈에 대해 모스 부호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있는 당신이 너무도 그립지만 이 세상의 말들은 이미 가볍고 얕은 정보에 점령당해 그 빛을 잃었으므로 차라리 우주의 어느 별을 중계 삼아 당신에게 ‘쓰리쿠션’으로 보내는 모스 부호를 두드린다고 했습니다. 자본과 기민한 정보에 ‘말’이 모두 흡수되고만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합니다. ‘말’이 본질과 현상, 안과 밖, 꿈과 실제, 너와 나를 잇던 ‘전설의 시대’가 너무도 그리운 이 가을이 지금 창 밖에서 속절없이 침몰하는 것을 보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왜 사느냐고 물어야 한다

소설가 박범신 씨의 글입니다. 친구 간, 심지어 가족 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소통 단절의 시대를 살면서, 그래서 발이 꼭 허방을 짚는 것 같은 헛헛하기 그지없는 시대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우리는 ‘왜 사느냐?’는 물음을 과연 물어야 할까요?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왜 사느냐?’는 물음을 더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세상을 살면서 그 물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과 한 주일 만에 교회에서 만나는데도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간 것처럼 우리 주위에서는 참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의 부통령 후보 토론도 있었지만 그래도 한인들을 가장 크게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한 여배우의 뜻밖의 자살 소식이었습니다. 거의 20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누려온 그녀에게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끝장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녀가 한 얘기 중에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얘기가 하나 있는데 가난하게 자라면서 수제비를 하도 많이 먹어서 돈을 번 다음에는 절대로 수제비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자기가 주인공을 했던 드라마처럼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넘겨온 그녀가 이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수백 억 대의 부자가 됐으므로 친구들과 웃으면서 먹기 싫은 수제비조차 옛날 얘기 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됐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이 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다고 하는데 사실 통계보다는 몇몇 유명인사들의 자살이 화제가 되곤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상당한 숫자의 연예인들의 자살을 했는데 대부분이 개신교인들이라는 사실이 제 주목을 끌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여배우가 자살했을 때는 교회에서 자살한 사람을 위해 장례예배를 해도 되는가를 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자살은 성경이 죄라고 못 박고 있는데 어떻게 장례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얘기였습니다. 몇 년 사이에 이런 논란은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자살이 상당히 자주 일어나니까 논란이 수그러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예인의 자살과 개신교 신앙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하필 자살한 연예인들이 대부분 개신교인들일까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지만 개신교의 신앙 또는 교회 분위기와 자살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지는 않을까요? 교회가 자살을 조장하거나 방조할 리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래 전부터 자살을 ‘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긴 했지만 혹시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는 성공지상주의의 가르침이나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는 물질만능주의 축복관 등이 거기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거나 좌절하게 만들어 잘못된 생각을 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우울증과 그것으로 인한 자살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고 격려해서 새로운 힘을 얻어 더 열심히, 더 충실히 자기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하는 데가 교회인데 교회가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공한 소수만을 ‘신앙의 모범’으로 내세워 많은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을 해봤습니다.

‘왜 믿느냐?’도 물어야 합니다

설교 서두에 저는 ‘왜 사느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우리 신앙인들은 ‘왜 믿느냐?’는 질문을 더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그냥 웃을 수 있을까요? 오늘 읽은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었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 머물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몰려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왜 광야로 몰려나갔을까요? 무엇을 보려고 그랬을까요?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허리에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아가는 기인(奇人)을 보러 그랬을까요? 그를 봐서 뭐 하려고? 아니면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갔을까요? 그들은 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은 요한의 옷차림을 염두에 두셨던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몸에 걸치는 옷에 대한 말씀은 아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광야로 나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말씀을 하시려 했겠지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거든 왕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려고 광야로 간다면 그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믿습니까? 왜 신앙을 추구하고 있고 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려고 믿습니까?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에 다닙니까? 화려한 옷 입은 사람과 사치스런 사람을 보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열심히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닙니까? 그게 아니라면 왜 믿습니까?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겁니까?

다음으로 예수님은 “예언자를 보러 나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겠지요. 그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알고 그를 보러 광야로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예언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요한이 있는 광야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볼 수 없고 예언자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왜 믿느냐?’를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우리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화려한 옷을 입으려고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님을 확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화려한 옷’과는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잘 믿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화려한 삶을 산다.’는 신앙은 한 사람의 개인적 신조나 삶의 목적은 될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과 신앙인의 삶의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는가?’라고 얼버무려서는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아닌 것은 아닌 겁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런 유혹을 물리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고민하는데 그런 고민에는 문제가 없으니 계속 고민하십시오. 정말 문제는, 그런 고민도 하지 않고 돌멩이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에 넘어가서 ‘물질의 축복도 받고 예수의 길도 걷고...’라는 터무니없는 위선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예언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언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갖고 있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물음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문제제기라는 얘기를 하지 않으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란 정의는 절반밖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보다 답이 무엇인지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문제를 잘 읽는 학생입니다. 질문에 이미 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이나 영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삶과 신앙의 문제 역시 질문에 이미 답이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묻느냐가 어떤 답을 내느냐를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믿는가?’라는 질문이 ‘이래서 믿는다’는 대답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 믿는가?’를 묻는 태도가 ‘이래서 믿는다’는 대답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습니까? 여러분은 왜 믿습니까? 여러분은 왜 교회에 나옵니까? 이런 물음들은 모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물음들입니다. 여러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에 나갔습니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교회에 다닙니까? 여러분도 화려한 옷을 입어보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은 그래� 갖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면 광야가 아닌 왕궁으로 가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언자를 보러 교회에 온 것입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믿음생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물음에 대해 쉬운 대답을 주는 예언자가 아니라 그 물음이 갖고 있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슈가 무엇인지를 심층적으로 묻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러 여러분은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울증도, 공황장애도 이길 수 있습니다

또 우울증이랍니다. 여배우의 자살에는 우울증이란 병이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울증이란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겨울 지경입니다. ‘또 우울증이야?’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옵니다. 모든 것을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데도 문제가 있고 반대로 우울증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암이 사람의 의지만으로 치료되지 않는 것처럼 우울증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고치겠다고 해서 고쳐지는 병이 아닙니다. 우울증도 몸의 병처럼 의사의 치료와 약의 도움을 받아야 나아질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암이라고 해서 지레 포기하는 사람보다 긍정적인 자세와 의지를 갖고 병을 대하는 사람이 고칠 확률이 높고 또 비록 병을 고치지 못할지라도 더 높은 질의 삶을 사는 것처럼 우울증도 당사자가 어떤 태도를 갖고 병과 싸우고 삶에 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공황장애’란 병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이유도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거나 빨라지고 땀이 많이 나고 몸이 떨리고 숨이 막히거나 답답하고 메스껍거나 불편하고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공황장애의 주요 증상입니다.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 공황장애라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인도 모르는 이 병을 그냥 방치하면 일에 아무 의욕도 못 느끼고 술과 마약에 빠지거나 심지어 죽음을 도피처로 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기부천사’란 별명을 갖고 있는 가수 김장훈 씨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그는 공황장애의 전형적인 증상을 거의 모두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병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밝히고 주위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고 기부하는 것으로써 자기 병을 고쳐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은 집 한 칸 갖지 않고 돈을 버는 대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음으로써 자기 병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무 병도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를 과신하기 때문에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병이 너무 힘들고 내 삶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남보다 내 삶이 더 버겁다고 생각들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고 공황장애고 모두 이길 수 있습니다. 싸우기를 포기하면 패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갖고 있는 문제 및 병마와 싸우면서 ‘왜 사는가?’를 묻고 ‘왜 믿는가?’를 묻습니다. 그럴 때 이 물음들은 싸우기를 포기하고 묻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비록 하나님은 단답형의 대답을 주시지 않지만 내 삶의 짐을 제대로 지고 가려고 애쓰면서, 나의 병과 싸우면서 이 질문들을 물을 때 우리는 대답을 듣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얻고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반드시 있습니다. 골짜기를 갈 때는 그 골짜기가 한없이 깊어 보이지만 언젠가 그 골짜기는 산 위로 이어집니다. 세차게 비가 뿌린 다음 날 하늘은 더 맑고 더 푸른 법입니다. 비록 지금의 삶이 힘들고 버겁더라도 견디십시오. 싸워 이기십시오. 왜 사는지, 왜 믿는지, 왜 하나님은 내게 삶을 주셨는지, 왜 내게 믿음을 주셨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마침내 얻고 행복을 느끼고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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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4)
  혹시 오달 2009-09-27 07:39:30
혹시 4001이 불혹이라고 읽고,
그 때가지 정신 안차리는 사람이
있을까봐 잠시 고민적 명상을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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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141)
  40이 불혹.. 김지영 2009-09-27 04:01:19
그건 인간 평균 수명이 50도 안될 때 이야기고,
지금은 90까지 다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불혹은 60쯤 잡고, 그 때 상황봐서
한 10년 더 늦춰도 되요.
추천0 반대0
(68.XXX.XXX.141)
  왜 믿느냐 물으신다면 최강국 2009-09-26 23:13:11
느꼈으니까요. 보았으니까요. 들었으니까요. 라고 답하겠습니다.
왜 신앙 생활을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혹은
왜 교회를 다니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믿고 있느가"로 시작하는 처절한 자기 반성을 할 수 밖에 없네요.
얼마전 40세 생일을 맞았는데, 불혹(free from vacillation) 이라더니만
저는 아직 많은 미망 속에 해메고 있군요.
추천0 반대0
(72.XXX.XXX.44)
  최소한 야곱의 씨름은 해야지.. 양민 2009-09-18 09:00:19
인생과 땀흘리며 씨름하여 무릎꿇히고
담담히 여유있게 남은 날을 살아가며
서로의 삶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격려할 동지들이 그립다.
추천0 반대0
(208.XXX.XXX.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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