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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그늘로 남의 그늘을 끌어안는 사람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2009년 09월 12일 (토) 00:22:14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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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서편제 이야기

 

1960년대 초 어느 산골주막에 30대 남자가 찾아듭니다. 그는 주막여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깁니다. 어린 시절 그가 살던 동네에 유봉이란 이름의 소리꾼이 찾아 듭니다. 그는 동네 아낙인 동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져 동호 모자를 데리고 마을을 떠납니다. 유봉과 그의 딸 송화, 그리고 동호와 그의 어머니, 이렇게 넷이 같이 살았는데 동호의 어머니는 아기를 낳다 그만 숨을 거둡니다. 그 후 유봉은 온갖 열의를 다해 송화에게는 소리를 가르치고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칩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동호는 생계에는 별 관심 없이 소리에만 몰두하는 유봉을 보다 못해 그와 다투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동호가 떠난 뒤 상심한 송화는 소리 배우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유봉은 송화의 소리를 완성하는 데 집착하여 송화가 집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눈이 멀면 소리가 틘다고 믿고 눈을 멀게 만드는 약을 만들어 그것을 송화에게 먹입니다.
1993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관객 백만 명을 넘기며 대단한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서편제>의 줄거리 일부입니다. 이 영화는 이청준의 소설 <남도 사람들>과 <소리의 빛>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임권택 감독이 한국의 전통 예술을 주제로 만든 첫 영화이기도 합니다.
유봉이 죽은 후 눈먼 송화는 시골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소리를 팔아 생계를 이어갑니다. 동호는 송화를 찾아 온 남도를 떠돌아다니다가 한 마을에 눈먼 여자 소리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찾아듭니다. 이들은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은 채 송화는 소리를 하고 동호는 북을 치며 밤새 연주를 합니다. 송화의 소리와 동호의 북이 만나 그간의 한을 풀어내는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저는 판소리를 자주 듣지는 않지만(여기는 국악방송이 없어서 라디오로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는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슬퍼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습니다. 판소리에서는 득음의 경지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 경지에 오른 소리를 알아듣는 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기준을 갖고 소리를 판단합니다. 제 마음을 슬프게 하면서도 위로하는 소리는 잘 하는 소리이고 그렇지 않은 소리는 잘못 하는 소리다, 이것에 제 기준입니다.

소리에 그늘이 졌다

소리꾼들 사이에서는 득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다른 말이 있는데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이 소리꾼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합니다. 이 ‘득음’ 또는 ‘그늘진 소리’는 의학적으로는 ‘성대결절(聲帶結節)’에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성대에 절묘한 결절이 만들어져서 나오는 소리라는 말씀입니다. 득음 또는 그늘진 소리란 의학적으로는 수없이 성대를 혹사해서 생긴 ‘병’(病)의 일종이란 얘기지요. 수련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수없이 지르다 보면 성대가 곪아서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면 인분 삭인 물을 마셔서 곪아 터진 목을 달래고 또 수련을 합니다. 소리가 배에서부터 울려나와 성대를 통과하면서 거기 맺힌 거친 결절에서 공명이 되어서 나올 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늘진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뒤틀리고 흉하게 일그러져 형성된 성대결절에 공명이 되어야 삶의 슬픔과 아픔과 처절함이 담은 소리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소리를 ‘수리성’이라고 부르는데 소리꾼들은 이 수리성을 최고의 소리로 친다고 합니다.
소리에 그늘이 졌다! 참 멋진 말 아닙니까? 한국에는 영어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는데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을 무슨 수로 영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란 뜻의 ‘voice’라는 단어와 그늘이란 뜻의 ‘shadow’라는 단어를 갖고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우리말의 정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사람의 외모에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말을 제가 여러 번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세가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 다윗이 정말 조각처럼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콧날이 오뚝했는지 눈동자가 깊었는지 마른 편이었는지 뚱뚱한 편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외모는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묘사하는 구절이 성경에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말씀과 요한복음 1장의 말씀 두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구절들입니다. 먼저 이사야 53장의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 말씀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누군가에 대한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이 노래를 잘 읽어보면 누군가를 묘사하는 노래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그의 외모를 직접적으로 묘하하지는 않고 대부분 은유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든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한 사람이란 표현은 외모에 대한 묘사 이상입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1장이 전하는 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을 봅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라고 말했으니 시각에 호소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이 말은 시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외모에 대한 말은 분명 아닙니다. 그 이상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늘진 삶

예수님에게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희희낙락하기만 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잔치 분위기가 그분에게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그에 못지않게 분명히 느끼는 점은 그분에게 그늘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이나 요한복음 1장의 말씀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밖에 다른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갖고 있던 삶의 그늘을 분명히 느낍니다. 그분은 실제로도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고 고통과 병고를 겪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던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길가에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 중에서 아무도 그분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불렀는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에게 왜 그늘이 없었겠습니까. 그 어린양의 모습이 얼마나 피곤하고 그늘진 모습이었겠습니까.
하기는 따지고 보면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듯이 각자의 삶의 그늘을 안고 살아갑니다. 모든 삶은 그늘진 삶입니다. 저는 판소리에서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을 읽으면서 득음의 경지라는 ‘소리의 그늘’과 모든 사람이 안고 가는 ‘삶의 그늘’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소리의 그늘은 끝없는 수련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그늘진 소리가 사람의 가슴을 적시고 영혼을 위로해줍니다. 그렇다면 삶의 그늘은 어떻습니까? 삶의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모두의 삶에는 그늘진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그늘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 같지 않습니다. 삶의 그늘 때문에 신세한탄으로 날을 새우는 사람도 있고, 남을 탓하고 남에게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탓하면서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느라 하루해가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삶의 그늘이 남의 탓이라며 남을 향해서,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불평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 삶의 그늘로 남의 그늘을 끌어안는 사람

그러나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성대에 생긴 아픈 결절이 배에서 나오는 소리를 감싸 안아 사람의 가슴을 적시고 영혼을 끌어안는 그늘진 소리를 만들어내듯이 주름 잡힌 내 삶의 그늘을 이웃의 삶의 그늘과 부딪쳐 공명시켜 두 사람 모두의 아픔을 치유하는 ‘그늘진 소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삶의 그늘을 노래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그늘진 소리를 만들어내는 소리꾼의 소리를 들을 때 마음 한 구석이 슬퍼지면서도 위로가 되듯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으면서 생긴 당신의 삶의 그늘로 죄인이라고 해서 소외되고 여자라고 해서 차별당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멸시 당하던 이웃의 삶의 그늘을 끌어안음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해주신 분입니다.
우리 모두 삶의 그늘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그 그늘이 왜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늘의 원인을 생각해보시라는 말씀입니다. 즉각적으로 ‘누구 때문이다’는 답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누구 때문인지가 분명치 않거나 ‘나’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누구 때문인지 밝히는 것이 그늘을 없애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늘은 늘 거기 있는 것입니다. 피하려고 해봐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삶의 그늘을 내 삶을 갉아먹는 적으로 삼지 말고 그것을 갖고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그늘’로 만들어 친구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예수께서 가르쳐주셨고 몸소 보여주셨다고 믿습니다. 당신 자신이 갖고 있던 그늘로 이웃의 그늘진 삶을 끌어안음으로써 서로 치유를 받는 길을 예수께서는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의 길을 우리가 걸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그늘을 탓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상처 받지도 않고 오히려 남에게 덕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네 삶 속에서 의미 있게 부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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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4)
  아멘, 그렇지요. 누구나 그늘은 있지만 최강국 2009-09-13 20:33:36
그 그늘을 대하는 태도는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겠지요. 주름 잡힌 내 삶의 그늘로 남의 그늘을 끌어 안을 수 있어야, 제자라 할 수 있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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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XXX.XXX.44)
  아멘, 그늘이 있는 자가 남의 그늘을 끌어안듯이 양민 2009-09-11 17:42:00
아파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고
배신당해 본 사람이, 진실로 남을 믿어줄 수 있고
가지지 않은 사람이, 가지지 않은 경험을 모르는 사람을 가여워 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추천0 반대0
(99.XXX.XXX.93)
  그늘은 누구에게나 있고 이원영 2009-09-11 17:15:52
그 그늘은 피해갈 수 없다는 말씀, 그 그늘을 친구삼아야 한다는 말씀, 와닿습니다. 내가 왜 이러냐고 아무리 분통을 터뜨려봐야, 돌아오는 건 더욱 힘들어진 세상 아닐까요.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것이 바로 그늘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해석해 봅니다. 그런데 곽건용님의 다른 컬러의 글은 언제 맛보죠?
추천0 반대0
(66.XXX.XXX.1)
  그늘이 없이는 김종하 2009-09-11 10:19:21
득음이나 득도하기 어렵다는 말씀, 나의 그늘을 넘어 남의 그늘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 찬찬히 곱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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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XXX.XXX.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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