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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의 순간도 필연이 된다
곽건용의 톡톡튀는 설교-순간의 선택
2009년 08월 26일 (수) 16:05:05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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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偶然)을 가장한 필연(必然)
   
곽건용 동문

불가(佛家)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5백겁의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겁’은 측정할 수 없이 긴 시간을 가리킵니다. ‘겁’은 사방상하로 1유순(由旬: 약 15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 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냈을 때 겨자씨를 전부 다 꺼내도 끝나지 않는 긴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우연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비슷한 믿음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연히 일어나는 일처럼 보여도 그것은 사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애기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사실은 인연이고 필연이란 얘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이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로 갈라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자리 잡게 한다고 했습니다. 인자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축복하시며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 언제 저희가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은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때 인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자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배고픈 자에게 무심코 건네준 한 덩이의 떡이, 목마른 자에게 무심코 건네준 한 잔의 물이 사실은 ‘무심코’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인연이었고 필연이었다는 얘기지요. 필연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필연은 언제나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른 평범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순간’은 얼마나 짧은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이 말은 오래 전에 나온 한 가전제품 회사의 냉장고 광고 문구였습니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그만 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만나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았던 어느 남편의 말입니다. 여기서 ‘순간’은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요? 10년을 좌우할 선택을 한 바로 그 ‘순간’, 한 사람에 반해서 결혼하여 평생을 해로(偕老)하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은 얼마나 짧은 시간일까요? 눈 깜짝할 사이일까요?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도 ‘즉시’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모두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즉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는 데 걸린 시간이 얼마나 짧았을까요? 복음서는 ‘즉시’라는 한 단어의 부사어로 표현했는데 바로 그 ‘즉시’라는 시간이 얼마나 짧았을까를 생각해보신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1초라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똑딱’ 하고 지나가버리는 그 1초라는 시간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시계는 지구의 자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자전의 시간은 하루 24시간이고 1,440분이며 86,400초입니다. 하지만 물리학적 시간은 이와 다르다고 합니다. 첨단 물리학 원리로 만들어진 원자시계가 정한 세계협정시의 표준 1초는 외부로부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세슘 원자가 9,192,631,770번 진동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1초라고 하는 절대시간입니다. 그런데 실제 지구의 자전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루에 7십만 분의 1초씩 느려지거나 빨라지거나 하는 오차를 보인다고 합니다. 줄곧 느려지지도 않고 줄곧 빨라지지도 않고 어떤 때는 느려졌다가 어떤 때는 빨라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원자시와 실제적인 자전시가 미세하게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지구와 우주의 운행이 언제나 정교하지는 않고 늘 일정하게 안정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유로 ‘윤초’ 제도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1972년 이래로 국제지구자전국이 6개월에서 2년 6개월 사이에 한 번씩 세계 협정시에서 1초를 더하거나 빼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자시와 자전시를 맞추는 것이지요. 따라서 윤초가 더해지거나 빼질 때는 59초에서 60초로 넘어가지 않고 59초를 두 번 반복하고 60초로 넘어가든지 59초에서 60초를 거치지 않고 바로 61초로 넘어가게 됩니다. 어떤 시인은 이 1초를 ‘가장 고독한 1초’라고 불렀습니다. 생각해보면 ‘윤초’라고 부르는 이 1초는 하루에 70만 분의 1초씩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그 오차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1초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똑딱’ 하고 지나가는 1초라는 시간이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순간에 일어난 폭발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들으시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왜 예수님은 하필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을까?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등장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우연이었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연이었다면 굳이 복음서가 그 사실을 적시(摘示)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계산을 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없습니다. 이후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정치적인 계산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한 30여 년 전에 제 스승이신 안병무 선생님이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등장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한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논문의 요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요한의 정치적 메시지와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일종의 거대한 폭발이었습니다. 그 폭발의 뇌관을 친 사건이 바로 요한의 체포사건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자세한 얘기가 없지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죄 사함의 세례운동에 큰 기대를 걸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겠습니까. 요한의 세례운동은 자발적인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이는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제도로 묶어놓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죄 사함의 세례를 받고 싶으면 요한이 세례를 주는 요단 강가로 가면 됐습니다. 그리로 갔던 사람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가로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있었고 부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리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곧 세상이 바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르게 살고 싶은 열망, 자기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정의가 바로 서고 공정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열망을 그들은 모두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그 열망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회개운동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운동이 확산되는 데 두려움을 느꼈던 헤롯이 요한을 감옥에 잡아가두고 결국 그를 처형함으로써 요한의 운동은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요한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자는 헤롯뿐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결탁해서 요한을 처형함으로써 그가 벌이던 운동을 좌절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폭발했습니다. 그분 안에 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는 세력에 대한 분노가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 열망은 곧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스스로도 새 출발을 하려 했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수많은 민중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열망,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열망이 예수님 안에서 터졌나온 것입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해서 용암이 터져 나오듯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그분에게서 그렇게 터져 나왔습니다. 민중의 열망을 받아들여 세례운동을 펼치던 요한을 잡아가둔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렇게 터져 나왔습니다. 요한이 잡히고 나서 예수께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그 순간은 59초에서 61초로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7십만 분의 1초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바로 그 1초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분출된 용암을 거칠 것 없이 흘러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신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망을 퍼뜨릴 동지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눈이 띤 사람들이 베드로와 안드레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명하시자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던 땅에서 엉덩이를 떼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이 얼마나 짧았을까요? 그 순간은 비록 시간적으로는 매우 짧았겠지만 그 깊이에 있어서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그들의 조상의 조상 때부터 열망해왔던 ‘메시아 왕국’에 대한 열망이 대폭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59초에서 61초로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누구입니까? 사람은 낚는 어부는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동안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낚는 어부’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해왔습니다. 그 동안 ‘사람을 낚는 어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려 했던 사람들이 예레미야 16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똑똑히 말해둔다. 이제 나는 많은 어부들을 들여보내어 이 백성을 고기처럼 낚게 하겠다. 그런 다음 많은 사냥꾼을 들여보내어 산과 언덕과 바위틈을 샅샅이 뒤져 이 백성을 짐승처럼 잡겠다. 이 백성이 어떤 일을 하든지 내 눈앞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 눈을 피할 수 없다. 그 잘못을 내 앞에서 숨길 수 없다. 숨도 못 쉬는 우상을 섬기어 내 땅을 더럽힌 죄, 내 소유지를 역겨운 우상으로 채운 잘못을 나는 갑절로 갚으리라.

만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의 부름 받은 제자들은 세상의 불의를 심판한 심판자들입니다. 세상의 불의를 심판하는 사람들,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을 악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안에 타오르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끌어주는 분이 없어 물고기를 잡으며 연명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가슴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는 타오르는 열망과 끓어 넘치려고 하는 열망의 만남이었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순간에 일어난 선택이지만 그 순간은 5백겁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새로 시작합시다. 우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풀고 새로 끼우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고 59초에서 61초로 넘어가는 순간으로 만들어봅시다. 후회 없는 생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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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켈리 2009-09-02 09:51:16
곽건용님의 글은 일단 마음이 차분해야 읽기 때문에
이제서야 제대로 읽었습니다.
너무 심오하면 오히려 댓글쓰기 어려운 것 아시죠?
많은 사람들이 잘 읽고 느꼈으리라 믿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43)
  신약과 구약 김한신 2009-08-27 23:08:14
곽건용님의 글을 읽으면서 구약과 신약에 대해 고민해 봅니다. 원글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혁명가와 같은 모습을 보이셨기 때문에 구약의 기독교와 신약의 기독교 사이에 괴리를 느낍니다.... 담에 만날때 여쭤봐야지.....
추천0 반대0
(76.XXX.XXX.88)
  올려주세요. 여몽 to 한신님 2009-08-27 20:58:32
답을 얻으신후 이곳에 좀 올려 주세요.
추천0 반대0
(68.XXX.XXX.94)
  천국에 가는 조건? 김판건 2009-08-26 20:21:37
헐벗고 굶주린 자를 예수로 생각하고 살아야할텐데...
추천0 반대0
(75.XXX.XXX.145)
  정말 좋은 글 김성수 2009-08-26 19:52:10
항상 곽 선배의 글을 읽으며 저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마음이 다시 한 번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추천0 반대0
(66.XXX.XXX.52)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독고량 2009-08-26 18:00:15
아크로폴리스 친구들만 보기에는 아까운 말씀입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210)
  열린 목사님 김지영 2009-08-26 05:43:44
불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한 열린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겁의 다른 정의: 사방 일유순의 바위 덩어리 위에 백년에 한번씩 실크 까운을 입은 천사가 내려오다. 그 천사의 옷깃에 스쳐서 그 바위가 다 달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 저는 이 정의가 더 생생합니다. 보기도 좋고.
추천0 반대0
(68.XXX.XXX.141)
  정말 매 1초를 필연으로 범선 2009-08-26 00:29:11
여기면서 살아간다면 인생은 얼마나 장대한 드라마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순간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새기겠습니다.
추천0 반대0
(76.XXX.XXX.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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