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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진화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14
2009년 08월 08일 (토) 00:42:35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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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진화한다
   
곽건용 동문

세상의 모든 것은 진화합니다. 물질이나 기계만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도 생명도 모두 진화합니다. 진화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입니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진화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멈춰서 있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합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진화합니다. 곧 발전된 방향,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진화’라는 말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화론 때문이지요. 하지만 ‘진화’라는 말에 거리낄 것 없습니다. 진화는 진화론이 나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진화는 진화론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에버하르트 융겔이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에 있다> God's Being Is in Becoming 이란 책을 쓴 것이 197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영어 번역판이 한 1백 쪽 남짓 되는 작은 책인데 저는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근본적으로는 삼위일체에 관한 책이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중이라는 책의 논지는 당시 제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지금은 세세한 내용을 다 잊어버렸지만 말입니다.
하나님도 진화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불변하는 분일 수 없습니다. 불변하는 하나님은 철학의 신이지 성경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변하고 진화할까요?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에게는 ‘상대’가 있고 하나님은 그 상대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대는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세계 전체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사고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요 상대자입니다. 하나님은 늘 변하는 피조물을 상대하시는 분이므로, 특별히 예측할 수 없이 변화무쌍한 인간을 상대하시는 분이므로 스스로도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변화는 다분히 수동적입니다. 상대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워낙 럭비공마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이므로 하나님도 어떻게 변화하실지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 원칙 없이 자의(恣意)적으로 변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사랑의 진화

오늘 설교 제목이 ‘사랑의 진화’입니다. 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도 있고 친구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있으며 자녀와 부모에 대한 사랑도 있고 진리에 대한 사랑도 있고 애완동물에 대한 사랑도 있으며 원수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제가 말하려고 하는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둘 사이의 관계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사랑에는 매일 한 번씩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묻고 확인해야 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이미 전제되어 있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랑, 알아보거나 확인할 필요가 없는 사랑도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은 대부분 전자에 해당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은 후자에 해당됩니다. 시편을 보면 곤경에 빠져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며 울부짖는 시인의 애타는 노래가 적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래들을 잘 읽어보면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음을 봅니다. 곧 신뢰에 바탕을 둔 울부짖음,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불평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겠습니까? 창조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심심해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갖고 놀 것이 없어서 세상을 만드셨습니까? 세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이런 저런 일을 일으켜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고 이리저리 조작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관계를 맺을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곧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상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혼자 사랑할 수는 없으므로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설교를 할 때는 마치 제가 하나님인 것처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피조물 중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피조물을 창조자의 형상대로 만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도 인간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기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극도로 발전한 컴퓨터가 결국은 인간세상을 지배할 것이란 음울한 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험한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위험한 행위를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당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존재가 필요하셨고 더 진지한 사랑을 나눌 대상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면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만드셔서 에덴동산에 두시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 명하셨지요. 만일 따 먹으면 그날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왜 선악과나무란 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왜 하필 동산 중앙에 두셨을까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을 줄 하나님은 모르셨을까요? 이런 얘기들이 요즘 주일 성경공부 시간에 공부하는 내용입니다.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분은 답을 압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미리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어떻게 되냐고요? 하나님은 인간의 미래를 이미 내다보는 능력과 관련해서는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면 전지전능이란 말을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전지전능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 때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지 모르셨습니다. 만일 아셨다면 “따 먹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일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만일 따 먹을지 이미 알았다면 계명은 아무 의미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따 먹을 터인데 금지명령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쓸데없는 짓을 하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 원죄 교리의 근거가 됐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원죄라는 교리 말입니다. 이 교리를 만든 사람은 어거스틴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지만 어거스틴이 이를 교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이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깊이 읽는 사람들에게 원죄 교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벌인 일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얘기를 얼마든지 달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신앙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이단자가 되지도 않으니 걱정 말고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갖다 놓으시고 그것을 따 먹지 말라고 명하셨을까요? 제 대답은 이것입니다. 사랑하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더 깊은 관계를 맺고 더 진실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어기면 벌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결과를 미리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따 먹는다면 어떻게 하고 따 먹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지 두 가지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따 먹든지 따 먹지 않든지 그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따 먹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우리는 모릅니다. 결과가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고통이라는 것을 겪게 됐고 에덴에서 추방됐습니다.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고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은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해서 부정적인 일만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선악과 덕분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뱀이 유혹한 것처럼 하나님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는 눈이 닫혀 있어 몰랐던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무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들은 선과 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만 알고 악을 모른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선을 알면 악을 아는 것이고 악을 알면 선을 아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따라서 선을 알게 되면 악까지 알게 되니 결국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 있는 위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첫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하셨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이를 통해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습니다. 두 인격이 서로 알아가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부딪치는 방법입니다. 직접 부딪치면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사랑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사랑은 더 위험해지고 치명적이 될 수 있습니다.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만일 로미오와 줄리엣이 집안의 반대가 없었더라면 그토록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할수록 더 집착하는 사랑을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Romeo and Juliet effect)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습니다. 자식들은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은 악착같이 더 하려고 하고, 떨어뜨리려고 하는 시험은 악착같이 더 불고 싶은 법이다. 10년씩 거듭 떨어지면서도 사법고시에 전념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고 금지된 장난이 더 달콤합니다. 시험 때가 되면 안 읽던 소설책이 더 읽고 싶어지고 여자 친구 못 만나게 하려고 부모가 방문을 잠가 놓으면 평소에는 높게 보이던 이층이 낮아 보여 용감하게 뛰어내리지요. 동성애 커플에게 아직도 사회적 장벽이 높습니다. 이 장벽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식욕상실, 불면증 등을 동반하는 정서적 혼란과 장애를 겪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장벽과 가족의 반대 때문에 동성애 커플 사이의 결합은 더욱 강화되고 서로를 더욱 갈망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의 또 다른 모습이다. 선악과도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더 먹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한 가운데 두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하신 이유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더 진실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겠지만 그만큼 둘 사이의 관계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로 하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깊어졌다가 깨질 뻔하고 다시 복원됐다가 이지러져온 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파노라마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이 관계가 극적인 변화를 겪고 진화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 과정을 짧은 설교 시간에 다 얘기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오늘 오후에 있을 성경공부 시간에 그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두 개의 에피소드를 읽고 그에 대해 공부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긴 세월과 과정을 훌쩍 뛰어넘어 요한복음 3장 16절로 가겠습니다. 복음 중에 복음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사랑은 서로 성격이 다른 두 인격이 만나서 부딪치면서 서로 비슷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인격이 만나 부딪쳐가면서 비슷해지는 과정이 둘 사이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두 인격은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어느 한편으로 비슷해져 갑니다. 남편이 아내와 비슷해져가든지 아내가 남편과 비슷해져갑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도 사람이 하나님 쪽으로 비슷해지든지 하나님이 사람 쪽으로 비슷해지든지 어느 쪽으로든지 비슷해져 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결단하셨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모든 시도들을 막고 징벌로 다스리려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쪽을 택하기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역사 이래로 천국은 늘 침략을 당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총칼을 들고 천국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침략을 당해왔습니다. 이 말씀을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위협해왔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다. 만일 이들이 총칼로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면 천국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닌 곳이 되고 말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천국을 지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놓으시기로 말입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인간 삶의 가장 후미진 곳에, 세상의 가장 변두리에,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어둡고 낮은 곳에 하나님은 당신이 머물 장막을 치기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사건 중에 사건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삶 속에서 살아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성육신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참으로 깊습니다. 이제부터는 인간이 굳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굳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고 인간으로 남아 있어도 넉넉히 하나님과 진실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게 됐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습니다. 깊은 사랑을 받았으면 거기에 걸맞은 깊은 사랑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네 삶 속에 장막을 치신 하나님의 사랑에 걸맞은 우리의 사랑을 어떤 것일까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장막을 치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사랑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 문을 열라고 윽박지르며 두드리는 대신 늘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성숙한 사랑을 나눌 때가 이제는 됐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만큼은 진화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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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3)
  변하는 하나님 김판건 2009-08-10 22:43:30
하나님도 변한다. 하나님도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목사님께 듣던 말씀 중에 제일 멋있는 말입니다. 제행무상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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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45)
  진화... 김한신 2009-08-08 11:08:44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라는 역사책을 보읽으면서 종교와 신학 - 특히 '삼위일체'의 개념-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봤을때의 충격을 기억합니다.
추천0 반대0
(75.XXX.XXX.11)
  사랑도 진화해야 워낭 2009-08-07 13:24:20
한다는 말씀,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스캇 펙의 사랑의 정의를 좋아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성숙시켜주려는 마음, 그것이라는 것.
추천0 반대0
(66.XXX.XXX.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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