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 금 18:48
> 뉴스 > 삶과 영성
       
존엄하게 죽기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13
2009년 07월 31일 (금) 23:41:20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곽건용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클릭!  

   
곽건용 동문
내게는 당연한 일이 남에게는 꿈같은 일이라면...

한 여자아이가 울면서 골목에서 뛰어나옵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아이의 손을 거칠게 잡아챕니다. 한 할머니가 덜컹거리는 경운기 뒷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짚단을 가득 실은 경운기를 모는 사람은 아들 같기도 하고 지나가다가 힘겹게 걸어가는 할머니에게 친절을 베푼 동네 아저씨 같기도 합니다. 앳된 소년과 소녀가 수풀 속 어딘가로 걸어갑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어색하게 걸어가는 소년의 걸음걸이와 긴장한 얼굴 표정이 숲속으로 들어가 소녀에게 첫 입맞춤을 할 각오라도 단단히 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난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라몬 삼페드로에게는 무척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28년 동안 남의 도움 없이는 1cm도 움직이지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서 생활해온 전신마비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28년 만에 바깥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는 판사 앞에서 인간답게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법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꿈이나 상상에서만 할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일 수 있습니다. 라몬 삼페드로는 자기 손으로 먹고 자기 발로 걷고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지 못합니다. 글을 쓰고 그것이 마음에 안 들면 찢어버리는 일들을 그는 할 수 없습니다. 라몬은 젊은 날 얕은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다가 모래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전신이 마비됐습니다. 목 위에만 감각이 살아 있는 그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그밖에는 아무 것도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특수 장치를 통해 나무 막대기를 입에 물고 글을 쓰는 것 이외에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28년을 지냈습니다. 젊은 시절 선박기술자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지만 지금은 사진 속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오직 꿈과 환상 속에서만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라몬에게 하루하루는 무기력하고 고통스런 시간이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존엄하기 죽기를 원하지만 그조차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죽기 위해서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자기 얘기만 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또 그 사건을 그것과 관련된 여러 관계들로부터 떼어내서 얘기하면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일에 대해서 남의 얘기까지 듣게 되면 판단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관계들까지 따져보면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많지 않습니다. 라몬의 소원은 단순합니다. 그는 인간답게 존엄하게 죽고 싶을 뿐입니다. 안락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자기 삶이 더 이상 존엄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절망과 공포에 몰려 순간적이고 충동적으로 안락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의 무관심과 방치에 절망해서 안락사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나이 많은 아버지가 있고 헌신적으로 자기를 돌보아주는 형과 형수가 있습니다. 그 형은 꼬장꼬장한 가톨릭 신자여서 자기 집에서 자살 같은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안락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는 형수는 28년을 하루같이 그를 먹여주고 씻어주고 욕창이 나지 않게 돌아 눕혀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안락사를 도와주겠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라몬이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라몬의 존엄한 죽음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이들 모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사랑

라몬의 안락사와 관련된 법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 훌리아가 그를 찾아옵니다. 그런데 훌리아 자신도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망가져가고 있고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녀는 원치 않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라몬과 다른 점은 그녀는 죽음을 원치 않고 두려워한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죽고 싶어하는 라몬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곧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되고 이해는 공감으로 발전하고 공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으로 발전해나갑니다. 이들은 눈빛과 말로밖에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지만 진정으로 서로를 깊이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눈물짓게 만듭니다.
라몬에게는 캔 공장에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싱글맘 로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TV에서 라몬의 이야기를 보고 무작정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처음엔 라몬을 설득해서 죽기를 포기시키려 하지만 만남이 지속될수록 로사는 그를 통해 형편없이 비참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자신이 삶의 의욕을 찾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라몬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이들의 사랑은 각각 다른 옷을 입고 있습니다. 라몬에게 사랑은 형사상의 책임을 감수하고라도 자신의 죽음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라몬의 가족에게 사랑은 끝까지 그를 책임지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훌리아의 라몬에 대한 사랑은 그가 쓴 아름다운 글들을 책으로 출판해서 그가 얼마나 죽음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세상에 알리고 그것을 통해 사법부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로사는 처음에는 라몬의 삶에 대한 의지를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28년 만에 세상에 나와 법정에 갔지만 한 마디 말도 해보지 못했고 존엄하게 죽겠다는 그의 권리 주장은 사법부에 의해 기각당합니다. 그는 결국 로사가 준비해준 약을 먹고 죽습니다. 친구가 이 소식을 훌리아에게 전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되묻습니다. “라몬? 라몬이 누구지요?” 훌리아의 병이 그 동안 더 깊어져서 그녀는 라몬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죽는 모습을 보면 살아온 모습이 보인다

10여 년 전 스페인 사회에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을 바탕으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abar) 감독이 만든 <바다 속으로 The Sea Inside>라는 영화 스토리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만큼이나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중요하다는 매우 무거운 주제를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우아하고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어 감탄이 절로 터지는 걸작입니다. 더욱이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나이가 서른두 살이었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서른두 살에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러웠습니다.
오래 전 신참 목사 시절 서울의 한 대학병원 원목으로 일하던 선배 목사님에게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보인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존엄하게 잘 죽는 것은 존엄하게 잘 사는 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존엄하게 잘 살아야 존엄하게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존엄하게 잘 사는 삶일까요?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존엄하게 잘 사는 것일까요? 권력과 돈으로 남을 내 맘대로 부리면서 쾌감을 느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일까요?
구약성경은 어떻게 사는 것이 존엄하게 잘 사는 삶인가에 대해 현대인이 납득하고 공감할만한 특유의 답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을 높이고 기리기는 하지만 복잡다단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감을 주는 면은 아무래도 약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거다!’라는 답은 없지만 ‘이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이 우리 질문에 대해 침묵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전도서가 바로 ‘이것은 아니다!’를 말하는 책입니다. 전도서는 하고 싶은 일 맘대로 하고 권력과 돈으로 남을 내 맘대로 부리며 살았던 사람(솔로몬)이 그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결론 내렸으니 그런 삶이 전도서, 아니 구약성경이 생각하는 존엄한 삶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한편 존엄하게 잘 죽는 일에 대해서도 구약성경에서 특별한 얘기를 찾기 어렵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야곱의 죽음처럼 자녀들을 축복하는 유언을 남기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평안히 죽어가는 것 정도가 구약성경이 생각하는 잘 죽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반면 신약성경은 존엄하게 잘 살고 잘 죽는 데 대해서 많이 얘기합니다.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바울 사도의 삶과 죽음은 그 중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 피신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를 외친 후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빌립보 1:20-21)라는 목표를 갖고 살다 죽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죽음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얘기합니다. 그의 삶과 죽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배신자’로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다와 함께 숨 쉬고 살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어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달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다가 한 짓을 잘 했다고는 보지 않았지만 그를 한 마디로 배신자로 낙인찍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유다에게 봤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유다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내칠 수도 없었습니다. 네 복음서 중에 유다의 죽음을 전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태복음 외에 사도행전이 있는데 사도행전은 유다를 대신해서 열두 번째 사도로 맛디아를 뽑을 때 마태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그의 죽음을 짤막하게 언급하는 정도로 그칩니다.
저는 여기서 유다의 배신과 죽음에 대해서 가급적 말하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초대교회에 있었음을 느낍니다. 게다가 신약성경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유다복음서>라는 복음서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유다와 그가 한 일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흐름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데 오늘은 본격적으로 그렇게 할 만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존엄하게 죽기

오늘 설교의 제목이 <존엄하게 죽기>입니다. 본래는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기 죽기>였는데 너무 설명조이고 내용을 미리 다 보여주는 것 같아서 <존엄하게 죽기>로 줄였습니다. 미리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 흥미를 잃는 법이니 말입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싫어합니다. 늙은 사람은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고 젊은 사람은 그것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제발 걸리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질병 중에 중풍과 치매는 늘 선두를 다툰다고 합니다.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러운 심각한 질병들이 수두룩하지만 중풍과 치매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들은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는’ 질병이기 때문이랍니다. 공감이 가는 얘기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죽음이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것, 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떤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전혀 모르는 것이 느닷없이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것이 결국 내게 오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1994년 2월에 노스리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미국 온지 3개월 밖에 안 됐던 저는 그것이 지진인지도 몰랐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생각하고 ‘역시 미국은 위험한 나라야. 미국에서는 너도나도 총을 들고 다닌다더니 총뿐 아니라 폭탄도 자유롭게 사용하는 모양이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지진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상 지진이 왔는데도 그것이 지진인 줄 몰랐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웬만한 지진에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지진이 났을 때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고 ‘이번에는 꽤 쎈데...’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남가주에 사는 우리는 언젠가 큰 지진이 올 줄 알고 있습니다. 소위 ‘빅원’이 올 가능성이 95%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지진에 대비해서 준비를 합니다. 물론 준비를 한다고 해서 올 지진이 안 오지는 않겠지만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아무래도 덜 놀라고 더 침착하게 처신을 하겠지요.
죽음은 지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진처럼 죽음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진에 대비한다고 해서 올 지진이 안 오지 않는 것처럼 죽음을 준비한다고 해서 올 죽음이 안 오지는 않지만 준비가 되어 있으면 아무래도 덜 당황하고 더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빅원’이 올 가능성이 95%가 넘는다고 하는데 죽음이 올 가능성은 그보다도 높습니다. 그 가능성은 100%이니 말입니다.
존엄하게 잘 사는 삶이 무엇일까요?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 사람에게 존엄한 삶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말해보면 존엄하게 잘 사는 삶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 더 정확하게는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기 속의 양심이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명령하는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물론 이 명령 그대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지만 반대로 이 명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존엄성은 이 양심의 명령과 실제 삶의 간격이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넓지 않은 사람은 존엄하게 잘 사는 사람이고 넓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존엄한 죽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존엄하게 잘 죽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죽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그렇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대로 죽는 사람, 이 사람은 존엄하게 잘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고로 죽든 병으로 죽든 아니면 늙어서 죽든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죽음의 존엄성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타살이냐 자살이냐 여부도 죽음의 존엄성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존엄하게 죽기를 원하는 라몬의 죽음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존엄한 죽음의 결정적인 요소는 그 사람이 어떻게 존엄하게 잘 살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존엄하게 잘 산 사람은 존엄하게 잘 죽게 되어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든 늙었든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죽을 죽음이라면 존엄하게 죽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존엄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양심의 목소리라고 부르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부르든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 맞춰서 존엄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 아크로폴리스타임스(http://www.acropolis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쓰기
이름 비밀번호
제목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현재 0 byte/최대 400byte)
전체기사의견(3)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원영to변변 2009-08-06 00:06:36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그거 붙이는거 참 쉽습니다. 붙이고 나니 매우 편안하더군요.
추천0 반대0
(75.XXX.XXX.127)
  가장 존귀한 죽음은 변우진 2009-08-03 07:22:20
자신의 장기를 기증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가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에 영화 [세븐 파운드] 를 보았는데 주인공은 일곱 명의 사람에게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고루 나누어주는, 거의 성자에 가까운 행적을 남기고 갑니다. 이 세상을 잘 떠난다는 것,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130)
  존엄사에 대한 이원영 2009-07-31 11:27:02
깊은 성찰이 담긴 글입니다. 죽음을 연구하는 학자나 영성가들은 사는 것 못지 않게 잘 죽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많은 생자들은 잘 죽는 것에 대한 준비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고 하지요. 잘 산 생은 결국 잘 죽음으로써 완결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존엄사라는 표현은 참 잘 지은 용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추천0 반대0
(66.XXX.XXX.164)
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3600 Wilshire Blvd., #1214 LA, CA, 90010, USA|Tel 1-818-744-100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경훈
Copyright since 2009 by The Acropolis Time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Editor@acropolis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