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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르다고? 아냐, 너무 닮아서 문제였던 거야."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12
2009년 07월 24일 (금) 22:31:22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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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다윗과 압살롬

다윗에게는 부인이 여럿 있었고 아들 또한 여럿이 있었습니다. 자식이 많아서 즐거움도 많았겠지만 한편으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자식들 간에 있었던 갈등 때문에 다윗 집안은 늘 시끌시끌했습니다.
그가 수하의 군인 헷 사람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벳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았을 때 나단 선지자가 야훼의 말씀으로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 가실 날이 없으리라”(사무엘하 12:10).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나단이 예언한 그대로였습니다. 첫 사건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복형 암논이 누이동생 다말을 겁탈한 데 앙심을 품고 암논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아버지의 처벌이 두려워 타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거기서 몇 년을 보낸 다음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에게서 민심이 떠나 있었던지 압살롬은 승승장구하여 다윗을 도망자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압살롬이 다윗 수하 장수의 손에 죽고 말아 반란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다윗이 입은 심리적, 정치적 상처는 매우 컸습니다. 나단의 말대로 다윗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다윗 왕가의 비극은 계속됐습니다. 다윗은 왕위계승 순위에서 솔로몬보다 앞서는 아도니야를 제쳐두고 솔로몬을 후계자로 택했습니다. 여기에는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와 예언자 나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런 낌새를 챈 아도니야는 늙어 기력이 없는 아버지 다윗의 뜻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야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피의 숙청’이 뒤따랐지요. 아도니야는 결국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에는 생각해볼 점이 많습니다. 둘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다윗이 부하 장군의 아내를 빼앗았듯이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을 백주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겁탈했습니다. 둘 다 망명생활을 하며 권토중래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비극적으로 결말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부하 군인들에게 압살롬을 절대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압살롬은 다윗의 군사령관의 손에 죽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하며 통곡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왜 이토록 비극적으로 끝났고 왜 다윗은 자기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위해 그토록 슬피 통곡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너무 닮아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닮았기 때문에 관계가 비극으로 치달았고 너무 닮았기 때문에 다윗은 압살롬을 잃고 그렇게 슬퍼했다고 말입니다. 둘의 관계는 애정과 증오가 극단적으로 공존했던 관계였습니다.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줬던 이유는 솔로몬이 다윗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상상해봅니다. 물론 상상이지만 상당히 그럴듯한 상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열정적이었던 데 반해 솔로몬은 냉정했습니다. 다윗은 즉흥적이었지만 솔로몬은 계산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까지 계산적으로 했던 사람입니다(열왕기상 8장). 이렇게 사로 달랐기 때문에 둘 사이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닮았기 때문

우리 겨레가 분단된 지 60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겨레가 아직까지 통일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난 60년 간 남과 북이 너무 달라져서 통일이 안 되고 있고 또 통일이 돼도 곤란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남과 북이 너무 달라져서 통일이 안 되는 걸까요?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남과 북이 너무 닮아서 통일이 안 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남북은 하나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 우리가 남이냐?’라고 외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은 지난 60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 아래 살면서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한 민족이고 한 형제자매이고 배달겨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남과 북이 너무 비슷한 데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냉정해질 때는 냉정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냉정해지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유일신을 믿는 대표적인 세 개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유대교, 회교가 그것입니다. 이 세 종교는 오랫동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이 세 종교는 종교 간의 평화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들은 왜 서로 사이가 좋지 않고 자주 분쟁을 일으킬까요? 세 종교가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세 종교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많은 점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싸웁니까? 불교와 회교가 싸웁니까? 힌두교와 유대교가 싸우는 것 보셨습니까? 다른 점이 많은 종교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비슷한 점이 많은 종교들끼리 서로 자기네가 옳다고 싸우는 법입니다.
흔히 다름이 갈등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개인들 간에도 서로 달라서 다툰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부부가 많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격이 너무 비슷해서 싸우고 급기야 이혼까지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 얼굴이 서로 다르듯이 성격 또한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다르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같은 점이 있다면 그걸 신기하게 생각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 특히 부부는 성격이 서로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격이 같아서 결혼했다고 오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부부는 상대방의 어떤 면에 끌려서 결혼한 것이지 성격이 같아서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같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사실은 원래부터 같지 않았는데) 화를 내게 되고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격 차이라고 말하는데 그 차이가 본래는 나와 같다고 생각했던 차이라는 말씀입니다. 

비슷하기 때문에 조심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장 14절 이하를 보면 하루는 예수와 제자 일행이 배를 타고 가시는데 제자들이 빵 가져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이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바리새인들과 헤롯파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빵이 없다고 걱정하시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눈치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빵이 없다고 걱정하다니, 너희들은 그렇게도 생각이 둔하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냐? 벌써 다 잊었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 남아서 거두어들인 빵조각이 얼마였더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또 물으셨습니다. “빵 일곱 개를 가지고 사천 명을 먹였을 때 남은 조각을 얼마나 거둬들였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일곱 바구니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답답해하시며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도 그 대답을 주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겼습니다. 아마 누구나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든지 아니면 마가도 답을 몰랐든지 둘 중 하나겠지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자기 복음서를 쓴 마태와 누가는 그렇게 답이 없이 수수께끼로 남겨놓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나름의 해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친절한 마태 씨는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의 ‘가르침’을 뜻한다고 해석해 놓았고(마태 16:12) 더 친절한 누가 씨는 마태가 해석해 놓은바 ‘바리새인의 가르침’도 그 의미가 모호하다고 여겼든지 바리새인의 누룩은 그들의 ‘위선’이라고 해석해놓았습니다(누가 12:1).
초대교회 시절 교회가 로마 정치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전에 교회와 앙숙관계에 있던 집단은 바리새파 유대교였습니다. 이는 곧 랍비 유대교라고도 불렸고 지금 유대교의 주류가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이 둘이 왜 앙숙이었는지 아십니까?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비슷했습니다. 다른 어떤 점보다 ‘말씀’에 최고의 권위를 둔다는 점에서 둘은 같았습니다. 비록 유대교가 모세의 말씀에 최고 권위를 둔 데 비해 기독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렇게 했다는 점은 다르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공동번역과 다른 여러 한글번역 성경들이 ‘재물’이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맘몬’입니다. 이 말은 그냥 돈이나 재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격화된 재물, 신의 위치에 올라가 있는 돈을 가리키는 ‘물신’(物神)의 아람어입니다.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섬기기

저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얼른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께서 2천 년에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2천 년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때도 돈이 제일이고 재물이 최고였을까요? 그때 사람들은 오늘 우리보다는 많이 ‘순진’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추측되는데 본래 가난한 사람들은 물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물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부자들이지요. 그래서 저는 예수께서 훗날 물신을 섬길 사람들을 미리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없지만 그 정도로 오늘날의 상황을 정확하게 내다보시고 경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긴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둘 사이에 비슷한 점이라도 있어야 아울러 섬기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오늘날 길을 막고 서서 지나가는 기독교인을 아무나 잡고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아마 그러면 100%가 그러면 안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비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면, 그리고 조금만이라도 성찰적인 기독교인의 눈으로 봐도 지금 기독교는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기고 있다고 보입니다. 큰 것과 많은 것, 윗자리에만 눈길이 닿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멋지게 치장하고 장식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신이 물신 곧 맘몬입니다. 그 욕망을 멋지게 치장해 놓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축복을 내려주시는 분이 됩니다. 물론 그 내용은 인간의 욕망이지만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분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포장해놓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포장했듯이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이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도록 도와주는 세력도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증(認證)해주는 가짜 성직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은 세상에서도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거부(巨富)였다고 역설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맘몬은 어울러 섬기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분으로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게 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뜻이 있어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렇게 창조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세상에 내보내셨을 때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이유는 각각을 세상에 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남보란 듯이 사는 것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일 리 없습니다. 우리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하고 무슨 일이든 의미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지금 당장 어렵다고 해서, 앞길이 안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물질의 풍요에 휘둘리지도 말고 당장의 곤경에 좌절하지도 말고 나를 세상에 내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오르막길이거나 내리막길이거나 한결같은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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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5)
  진리와 맘몬 길마니(정종선) 2009-07-26 00:21:47
전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신앙이나 종교를 갖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이 그런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리라 믿어지긴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평온, 거기에 가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맘몬. 결국 그런 저런 이유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저같은 무신론자는 진리는 신앙가진 분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삶에 있다 생각하고 그걸 찾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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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123)
  종교간이 다툼 김판건 2009-07-25 20:53:47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이고, 친구간도 싸우면 1주일이면 풀립니다. 옆집과도 1달이면 풀리고, 나라 간의 싸움도 몇년, 몇십년 지나면 풀립니다. 그러나 종교 간의 싸움은 영원히 풀리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비슷해서 싸우고 서로 틀린 것이 많아서 안 싸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힌두교와 회교는 서로 아주 많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이 살상을 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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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45)
  absalom, absalom 김지영 2009-07-25 01:15:46
포크너의 소설 absalom, absalom
미 남부의 명망가 집안의 진실,
권력과 반항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입니다.
추천0 반대0
(68.XXX.XXX.141)
  한국와 일본과의 악연도 같은 맥락인 것 같네요 최응환 2009-07-24 11:26:50
다윗과 압살롬, 한국과 북한,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하느님과 맘몬을 아우르는 공통점을 찝어내다니 역시 대단하십시다. 근데 유대교가 모세의 말에 최고권위를 두나요?
추천0 반대0
(198.XXX.XXX.13)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이원영 2009-07-24 07:27:41
한결같은 걸음으로 걷는 길...오늘의 묵상으로 삼겠습니다.
추천0 반대0
(75.XXX.XXX.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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