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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되는데 난 왜 안 돼?"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11
2009년 07월 15일 (수) 22:23:56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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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이 여인들의 용기 덕분에

조시 에임스(Josey Aimes)는 남편의 매질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북부 미네소타의 친정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아들과 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등 갖은 말썽을 피워온 딸의 귀향이 아버지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업을 찾다가 광부로 일하고 있는 친구 글로리(Glory)의 소개를 받아 광부로 취직합니다. 그 광산은 조시의 아버지가 평생 일해 온 광산이기도 했습니다. 때는 1980년대 중반으로 한편으로는 많은 광산들이 문을 닫아 광부의 대량실업 사태가 빚어지고 있던 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되어 여성노동자에 대한 할당제가 시행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녀에게 광부의 노동은 육체적으로는 매우 고된 노동이었지만 임금이 다른 직업보다 상대적으로 높았으므로 두 아이들 데리고 자립하기 위해서 조시는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조시를 비롯한 여성 광부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고된 노동이 아니라 여성 광부들을 대하는 남성 광부들의 태도였습니다. 광부란 직업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으므로 남성 광부들에게 여성 광부들은 동료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 광부들을 직장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데 그것들이 치사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성들에게만 과도하게 힘든 작업을 하라고 지시하거나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약과였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지독한 음담패설을 거리낌 없이 던지거나 함부로 몸에 손을 대기도 하는 등의 성적 학대와 폭력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간이 화장실에 용변을 보러 들어갔는데 여러 남자들이 간이 화장실을 흔들다가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있던 여자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말았지요. 남자들은 여자 탈의실에 음란한 내용의 낙서를 하기도 했고 여자 광부의 도시 락에 음란한 물건을 넣어두기도 했습니다.

조시는 광부로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의 신뢰와 사랑을 회복하기 원했고 두 아이를 잘 기르고 싶어 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능력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고 자기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부모에게 인정받는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광부들에 대한 남자들의 성적 모욕과 학대에 가까운 조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그녀에 대해서 노조와 회사 측이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그녀의 희망의 싹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노조와 회사 측은 그 정도의 장난과 그까짓 농담 갖고 뭘 그렇게 야단하고 시끄럽게 만드느냐고 오히려 조시를 힐난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그녀의 노력에 대해 여성 광부들도 무관심하고 냉대하며 심지어 멸시로 일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끄럽게 굴어봐야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여성 광부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남성들은 자기 밥그릇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적극적으로 모욕하고 학대하는 가해자의 길을 걷는 데 반해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반대로 모욕과 학대를 참고 견디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피해자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조시가 한 남성 광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 사건을 회사에 보고하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하루아침에 그녀를 해고해버렸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하라던 회사 사장은 보고하러 온 조시를 그 자리에서 해고했습니다. 이에 그녀는 소송을 걸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변호사는 빌 화이트였습니다. 그러나 빌은 변호사로서 실패하고 낙향해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녀는 빌에게 부탁하지만 빌은 그런 소송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오히려 그녀를 설득해서 포기시키려 합니다. 중간이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빌은 소송을 맡았지만 상대방 변호사는 빌과는 급이 다른 유능한 여자 변호사였습니다. 누가 봐도 빌과 조시의 패배로 결말지어질 소송이었습니다. 그들이 승소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수의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소송을 거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시는 동료 여성 광부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설득하지만 해고될까봐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패배가 코앞에 다가온 절체절명의 순간에 루 게릭 병으로 죽어가던 글로리가 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그러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다른 여성 광부들도 한 사람씩 일어나 참여 의사를 표명했고 심지어 조시의 부모와 다른 남자 광부들까지 합세하여 결국 승소를 이끌어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킬 수 있다

2005년에 나온 《노스 컨트리 North Country》라는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법정 드라마는 몇 개만 보면 결말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뻔해도 마지막 순간에 뒤집어져서 정의가 이기는 얘기는 늘 감동을 줍니다. 이 영화는 1984년에 미국 최초로 일어난 직장 내 성폭력 집단소송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는 기본 줄거리만 실제 사건에서 가져왔고 대부분은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소송으로 인해서 직장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형태의 크고 작은 성적 모욕과 성폭력 행위가 엄한 법의 제재를 받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성폭력으로부터 받는 법적인 보호 장치는 바로 이 소송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민주국가라는 미국에서 불과 24년 전 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킨다는 얘기는 비단 산불 얘기만은 아닙니다. 불의와 맞서 싸운 소수의 힘없는 사람들의 투쟁이 이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중요한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아주 미미한 일에서 시작해서 크고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배우 조디 포스터(Jodie Foster)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1988년 영화 《피고인 The Accused》은 ‘강간’이라고 하는 범죄행위의 법적인 개념을 바꾸어버린 영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6초에 한 번씩 강간범죄가 저질러진다고 합니다. 이만하면 가히 ‘강간의 나라’라고 불러도 될 정도입니다. 6초에 한 번 꼴로 벌어지는 범죄행위의 법적 정의를 한 영화가 바꾸어버렸다면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 아닙니까? 얘기는 이렇습니다. 이 영화 이후로 상대방이 성행위를 중단하기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사를 무시하고 행위를 계속했다면 상대방이 거부한 시점이 언제든 간에 그 행위는 법적으로 강간으로 인정받아 처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비록 양자가 동의하여 행위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도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즉각 중단해야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됩니다. 강간이란 범죄행위의 법적인 정의가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영화 한 편이 이루어놓았으니 굉장한 일 아닙니까?

오늘 설교에 영화에 매기는 등급을 매긴다면 ‘R’ 등급이나 ‘NC17’이 되겠습니다. 미성년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씀인데 이 자리에는 미성년자가 없으니 편한 마음으로 계속하겠습니다.

창세기 38장과 요한복음 8장은 성매매 또는 간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인을 사람들(대부분 남자들이었겠지요)이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라고 예수께 대들듯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한참 동안 침묵하시며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고 계시다가 고개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쳐라.” 그러자 이번에는 군중들의 입이 얼어붙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를 치려던 돌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그녀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유명한 얘기입니다.

이 얘기에 비해 덜 알려져 있지만 더 흥미로운 얘기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에게 에르와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다말이란 여인과 결혼한 맏아들 에르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이스라엘 뿐 아니라 고대 중동 여러 지역에 비슷한 관습이 지켜지고 있었습니다)에 따르면 큰아들이 후손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형 집안에 후손을 잇게 해야 했습니다. 이를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이고 부르고 영어로는 ‘levirate marriage’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을 맏며느리 다말의 방에 들여보내 그녀와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오난이란 자가 형수에게 자식을 만들어주지 않으려고 정액을 바닥에 흘려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가 하나님 눈에 거슬려 오난이 죽어버렸습니다. 두 아들을 졸지에 잃은 유다는 막내 셀라마저 어떻게 될까봐 다말에게 ‘셀라가 어른이 될 때까지 친정집에 가 있으라.’고 명하고 그녀를 친정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말이 ‘셀라가 어른이 될 때까지...’이지 사실상 유다 는 큰며느리 다말을 내쳐버린 것입니다.

그 후 꽤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긴 세월이 지나고 막내가 성인이 된 후에도 유다가 다말을 부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하루는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길을 떠난다는 소식을 다말이 듣고 창녀처럼 차리고 길가에 나가 앉았습니다. 유다는 너울로 얼굴을 가린 다말이 자기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그녀를 샀습니다. 몸값으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했으니 화대를 외상 하기로 한 셈입니다. 언제 봤다고... 다말은 담보로 유다의 인장과 지팡이를 맡기라고 했지요. 유다가 그녀의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거래가 이루어져 둘은 그날 동침했고 다말은 임신했습니다. 유다가 나중에 친구를 시켜 새끼염소 한 마리를 주고 인장과 지팡이를 찾아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그 동네에 가서 창녀 다말을 찾았지만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는 얘기만 듣고 다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다말이 꾸민 일이니 그런 창녀가 거기 있을 리가 없지요.

석 달이나 지난 후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유다 귀에 들어왔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다는 당장 다말을 끌어와 화형에 처하라고 명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가부장이 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다말은 갖고 있던 인장과 지팡이를 유다에게 보내며 이 물건의 주인이 아기의 아버지라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이 아이가 나보다 더 의롭구나.”라고 말했다 는 것입니다.

세 이야기를 모아 하나의 그림을 그리면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이야기, 그리고 영화 《노스 컨트리》는 서로 조금씩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메시지를 종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간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 얘기의 중심에는 ‘불평등’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간음한 여인을 예수께서 어떻게 다룰지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간음한 여인보다는 그녀를 끌고 온 군중들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간음을 혼자 합니까? 간음은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범죄라면 남자와 여자 모두의 범죄이지 어느 한편만의 범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 앞에 끌고 온 사람은 여자뿐이었습니다. 남자는 투명인간처럼 사라졌습니다! 권리에만 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도 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에 대한 처벌에도 물론 똑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가난하다고 지은 죄를 봐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남자 와 여자가 간음죄를 졌으면 둘이 똑같이 처벌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자들이 다 사라지자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여자에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간음을 죄로 여기셨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니 “네 죄를 묻지 않겠다.”거나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간음은 분명 예수님에게도 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간음보다 더 큰 죄를 보셨는데 그것은 불평등의 죄였습니다. 불평등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삶의 현실입니다. 똑같이 간음죄를 저질렀는데 여자만 처벌받아야 하는 불평등, 그런 불평등에 대해서 아무런 인식도 없고 아무 문제도 못 느끼는 군중들의 습관화된 불평등에 대한 무개념, 이것이 예수님 눈에는 더 큰 문제요 더 큰 죄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의 얘기 역시 성매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다말이 저지른 성매매의 죄(이 죄는 유다도 같이 저질렀습니다)보다 더 중한 죄는 다말에 대한 유다의 ‘생존권 박탈 죄’입니다. 다말이 죽은 남편의 동생과 동침하면서까지 아이를 낳아야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다 집안의 가문을 잇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다말이 남자 없이 못 사는 여자여서 너울을 쓰고 길거리로 나가 창녀 노릇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존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다말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시아버지에게 자기 생존권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이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존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에 나중에 유다도 “이 아이가 나보다 더 의롭구나.”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노스 컨트리》가 제기하는 문제는 인간의 평등권과 생존권, 더 나아가서 성과 인종,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든 인격이 갖고 있고 누려야 하는 ‘인격권’을 무시하고 침해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이 시간에도 너무도 쉽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우리 자신조차 아무 생각 없이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그런 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남자 광부들은 여자 광부들을 그렇게 성적으로 희롱하고 농락하면서도 그런 말과 행동들이 농담이고 장난이라고 말합니다. 당하는 사람의 비참한 느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재미있으라고 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영화를 보면 아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치가 떨릴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치졸하고 비루하고 졸렬할지 정말 눈뜨고 못 볼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그저 농담이었다고, 장난이었다고 얼버무리고 맙니다.

이 일은 19세기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불과 2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럴듯하지도 않은 온갖 핑계들을 댑니다. 사업상 어쩔 수 없이 여자가 접대하는 술집에 갈 수 밖에 없다느니, 남들이 다 그러는데 나만 안 그러면 왕따가 된다느니 하는 추한 핑계를 대면서 한 사람의 평등권과 생존권을, 한 인격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무참히 짓밟고 있습니다. 그런 거짓말, 이제부터는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라도 남편과 아내에게 부끄러운 아내와 남편이 되지 마십시오. 자식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저지르지 말아야 할 죄의 목록이 길고도 깁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하지 말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도 들어서 귀를 막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이른바 ‘죄’의 목록 중에는 ‘왜 이런 것까지 하지 말라고 하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쩨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별 것 아닌데도 마치 대단한 죄인 양 호들갑을 떠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확고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런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그것이 죄인지를 분명히 구별해주고 판단해주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왜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이 교회에서 그렇게 대단한 금기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해가 되고 간접흡연의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면 공감할 수 있지만 그런 일들이 무슨 대단한 종교적인 죄인 듯이 호들갑을 떠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위가 죄라면 그렇게 판단할 명백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봐서 그 행위가 그렇게 대단한 잘못인지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납득시킬 수 없다면 그것들을 죄라고 부르면 안 되지요.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죄가 아닌지, 그리고 무엇이 무거운 죄이고 무엇이 가벼운 죄인지를 구분하는 기준들 중 하나는 사람의 생존권과 평등권과 인격권을 존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성매매가 죄인 이유는 그것이 인격권을 짓밟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희롱과 성학대, 성폭력이 농담이나 장난이 될 수 없고 중대한 범죄인 이유는 그것들이 피해자의 인격은 말할 것도 없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의 인격까지도 파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자 되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 만나는 사람들의 생존권과 평등권과 인격권을 존중하는 기독교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직원을 새로 받을 때뿐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직원을 내보낼 때도 최대한으로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주인과 상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몸부림친다고 뭐가 바뀌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내가 바뀌면 내 아내나 남편이 바뀔 것이고 내 아이들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직장 동료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들의 가족들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나 하나가 바뀌면 바뀔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고 그런 영역이 상당히 넓습니다. 그러니 ‘나 하나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하는 생각을 땅을 깊이 파묻어버리고 ‘내가 바뀌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담으십시오.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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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0)
  곽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니 독고량 2009-08-28 11:26:58
이젠 은근히 기다려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읍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210)
  여몽님 이원영 2009-07-16 23:02:24
오랜만에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주변에 친구분들도 함께 놀러 오세요.
추천0 반대0
(75.XXX.XXX.96)
  곽 선배님 김종하 2009-07-16 22:43:03
아니 곽 목사님, 정말 존경스런 마음이 샘솟게 하는 말씀이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132)
  오계(2) 여몽 2009-07-16 16:50:48
statement 같읍니다. 신명기 5장 18절의, Neither shall you commit adultery가 있기는 하나 불교에서의 사음이란 남녀가 서로 좋아 하여 행하는 행위는 사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읍니다. 여성의 인격이 개입되지않는 돈과 힘 그리고 강제를 수반 하는 행위가 곧 사음이라는 것 같읍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간음또한 사음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둘이 서로 좋아 하는 사이라면..... 생존권, 평등권, 인격권...
추천0 반대0
(68.XXX.XXX.94)
  오계 (1) 여몽 2009-07-16 16:43:08
곽 samgate의 설교를 들으니 불교의 5계를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ㅤㅊㅓㅊ번째 계율이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명도 죽이지말라... 이는 신명기 5장 17절에서 지시하는 You shall not murder. 보더 훨씬 더 포괄적인,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생존권을 인정 하라는, 인간만이 생존권이 있는게 아니라는 statement 같읍니다. 세번째 계율이 사음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 또한 남녀 평등권과 그ㅤㅇㅖㅊ날에 여성의 인격권을 인정한 위대한.
추천0 반대0
(68.XXX.XXX.94)
  곽건용님은 이런 글을 쓰시면서 이원영 2009-07-16 16:28:27
어떻게 얼굴은 그렇게 평화로우신지요. 읽는 제가 치까 떨리는 분노를 느끼는 데 말입니다.
정말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타인의 인격권을 무참하게 짓밟는 그런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 세상사인 것 같습니다. 작은 불꽃, 정말 중요한 불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담배와 술에 대한 얘기 저도 감동이었습니다. ㅎㅎ
추천0 반대0
(66.XXX.XXX.16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주혜정 2009-07-15 13:22:08
영화빼고는 다 아는 말씀인데 다시한번 생각해보네요.
감사합니다.
추천0 반대0
(76.XXX.XXX.54)
  짓지 말아야 하는 죄 양민 2009-07-15 12:21:58
법(세상법과 종교율법)과 지위를 이용하여, 정의나 진리를 왜곡하여,
남에게 억울한 피해를 입히고, 자신의 유익을 구한 죄는,
어느 종교나, 어느 신이나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죄들이다.
자기의 죄에는 관대하고, 스스로를 속이다 보면,
하늘마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경지에까지 가는 걸까?
무서운 일이다.
추천0 반대0
(99.XXX.XXX.212)
  저는 이따가 저녁에 묵상 이원영 2009-07-15 09:15:20
하면서 읽겠습니다. 매주 이렇게 길고도 선명하고 울림이 큰 글을 쓰신다는 것,
존경스럽습니다.
추천0 반대0
(66.XXX.XXX.164)
  중앙일보 수요일 섹션이 종교 섹션인데... 이경훈 2009-07-15 09:00:26
ㅋㅋㅋ. 아크로도 수요일자에 곽 선배 글을 싣네요.

보통 오전 오후 둘로 나눠 읽었는데, 오늘은 다 읽었습니다. 좋은 말씀!
추천0 반대0
(75.XXX.XXX.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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