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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뜻 때문에 소자에게 내밀 손이 없다면“
곽건용의 톡톡 튀는 설교 10
2009년 07월 08일 (수) 23:17:05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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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동문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니

제가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른 기억력도 좋지 않지만 사람에 대한 기억력은 더 그렇습니다. 제게는 목사로서 부적합한 점들이 여럿 있는 줄 아는데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하다가도 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기억이 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상대방에게는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닌 줄 알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기억하는 척 했다가는 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렇게도 못합니다. 그런데 반대의 일을 겪고서, 곧 저는 생생히 기억하는데 상대방이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겪고서 저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나쁜 기분을 조금 은 실감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는 성격이 좀 까칠하긴 했지만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제법 ‘모범생’이어서 저를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사대를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오신 여자 음악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선생님의 총애를 받아 한 번은 그 분 댁에 초대를 받아 놀러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집은 ‘개학을 해도 방학’이란 우스개가 있는 서울 최북단 방학동에 있었는데 가보니 다른 집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집이 꽤 컸지만 그래도 식구가 너무 많았습니다. 대문에는 사람 이름이 적힌 문패대신 ‘새벽의 집’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한 식구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식구가 모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공동생활 규칙을 지키겠다고 하면 그 집에 들어와 살 수 있다고 했고 잘 곳이 없는 사람도 원하는 만큼 돈을 안 내고도 머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던지 더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그 선생님을 우연히 다시 만났습니다. 서울 향린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할 때 서울노회 연합모임이 있어서 갔는데 거기서 수도교회에 다니던 그 선생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새벽의 집’이 무엇을 하던 곳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집’은 우리 교회에서 설교해주신 적이 있는 문동환 목사님이 수도교회에서 목회하실 때 교회 청년들과 더불어 시작한 공동체입니다. ‘한겨레신문’에 지금 연재되는 ‘길을 찾아서’란 문 목사님 회고록에 ‘새벽의 집’ 이야기와 함께 제 음악 선생님 이야기도 나옵니다. 선생님의 남편이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저는 그 글을 보고 알았습니다.

‘소자’ 하나에 대한 이야기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얘기를 아무리 해도 그분은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그래서 미안해했습니다. 아무리 교직 첫 해였고 귀여운 학생이었다 해도 한 해 졸업생이 8백 명에 넘는 학교를 20년 전에 졸업한 학생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일은 무리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무척 섭섭했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 10:42).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으니라(마태 18:6)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태 18:1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 25:40).

저는 그 동안 이런 말씀들을 예수님께서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과장해서 말씀했거나 극적으로 표현하셨던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다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들이대니까 소자, 또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로 드심으로써 잘났다고 들이대는 사람들에게 면박을 주신 것으로만 생각해왔습니다. 분명 예수님에게 그런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소자’라는 말을 사용하신 더 큰 이유는,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더 피부에 와 닿는 까닭은 ‘소자’라는 말이 갖고 있는 ‘구체성’과 ‘기명성’(記名性) 때문입니다. 비록 구체적인 이름은 들지 않으셨고 또 ‘소자’가 고유명사는 아니지만 그 말은 고유명사 못지않은 구체성과 인격성을 담고 있습니다. ‘소자’는 어린 아이도 아니고 체구가 작은 사람도 아니며 가난한 사람만을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소자’라는 말에는 이름이 들어 있고 거기서 우리는 울고 웃고 기뻐하고 화를 내는 등 표정이 살아있는 얼굴을 볼 수 있으며 구체적인 한 사람이 겪는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악마는 돌로 떡을 만들어 높은 성전 위에서 뿌리면 수많은 군중이 받아먹고 환호할 것이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돌과 군중이 가진 ‘익명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은 한 ‘소자’가 수줍게 내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두 마리의 물고기와 다섯 덩어리의 보리떡에는 그것을 내놓은 소자의 이름과 표정과 이야기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한 2~30년 쯤 전에 성경이 텍스트(text)냐 컨텍스트(context)냐를 두고 한국 진보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 스승이신 안병무 선생님은 성경이 텍스트이고 삶의 상황이 컨텍스트라고 주장했고 같은 민중신학자인 서남동 교수님은 반대로 삶의 상황이 텍스트이고 성경은 컨텍스트라고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에 비추어 삶을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삶에 비추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당대의 두 거장 신학자의 ‘진검승부’는 둘 다 중요하다는 식으로 해서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단지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란 얘기였습니다. 7~80년대라는 엄혹한 상황이 한가하게 그런 논쟁을 벌이기에는 급박했다는 점이 무승부를 강요한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는 절대적으로 안병무 선생님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 제자이니 당연하다고도 하겠지만 왠지 텍스트는 중요한 것이고 컨텍스트는 텍스트보다 덜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남동 선생님 주장에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는 경우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없으면, 삶이 뜨겁고 치열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는 눈도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소자’에 관한 얘기를 여러 차례 하셨고 저는 그 말씀들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나 ‘소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도록 제 눈을 열어준 ‘사건’은 직접 겪은 크고 작은 일들입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한 음악선생님을 만난 일이 그랬고 이제부터 얘기하려는 영화를 본 경험이 그랬습니다.

익명(匿名)에서 기명(記名)으로

한 여자가 밤중에 곤히 자는 아들을 황급히 깨워 대충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와 동생 집으로 갔습니다. 필라라는 이름의 여자가 남편 안토니오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친 것입니다. 필라는 7~8세 쯤 된 아들과 함께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미술관에서 표를 파는 일을 했습니다. 안토니오는 필라의 주변을 맴돌면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녀를 설득합니다. 그는 가정폭력을 치료하는 클래스에서 치료를 받는 등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진지하고 끈질긴 노력 덕분에 그의 상태는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미술관 관장은 필라에게 큐레이터의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가끔 그 일을 시켰습니다. 필라에게도 그 일은 매우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불안하긴 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녀가 보기에 늘 곁에서 맴돌면서 자기가 변했다고 그녀를 설득하며 집으로 돌아오라고 애원하는 남편의 노력은 가상합니다. 그녀 눈에도 남편의 병이 어느 정도는 치료됐다고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라는 안토니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외줄 위를 걷는 것 같이 불안하긴 했지만 한 동안 비교적 잘 지냈습니다. 남편은 정말 나아진 것 같았습니다. 그녀를 위해 미술 책을 사다주기도 했습니다.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남편은 그때마다 인내하며 화를 조절하는 절제력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임시 큐레이터로 일하던 필라에게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취업 인터뷰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그녀는 계속 일을 진행시켰고 마침내 인터뷰 날 아침이 됐습니다. 전날 반듯하게 다림질해 놓은 옷을 입고 나가려는 필라에게 안토니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너를 드러내고 싶으냐? 사람들이 너를 봐주고 네 얘기를 들어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느냐? 그렇게 보여주고 싶으면 마음껏 보여줘라.”라고 소리치며 그녀를 벌거벗겨 아파트 발코니로 몰아낸 후 창문을 잠가버립니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필라는 울며불며 창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합니다. 안토니오는 곧 창문을 열어주어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쓰러져 하염없이 웁니다. 며칠 후 필라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집에 와서 남편이 보는 앞에서 자기 물건들을 챙겨서 집을 나갑니다. 안토니오는 그렇게 떠난 아내가 길을 건너는 모습을 그녀를 벌거벗겨 내쫓았던 아파트 발코니 창문을 통해 내다봅니다. 영화는 그렇게 끝납니다.

이 영화는 스페인의 오스카상이라고 부르는 고야 상을 여섯 개 부분이나 석권한 <Take My Eyes>입니다. 이 영화의 여러 미덕들 중 하나는 가정폭력에 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폭력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영화에는 남편이 아내를 때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흔히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는 그런 장면도 없고 유혈이 낭자한 장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폭력이 없어도 영화는 말로 하는 폭력이 얼마나 나쁜지를 잘 보여줍니다. 안토니오의 폭력은 갑작스럽게, 전혀 통제되지 않게 터지는 분노의 소리 지름, 집어 삼킬 듯이 압도적 표정 등으로만 드러날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보는 사람은 물리적인 폭력을 보는 것 이상으로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한 마디로 연기를 잘했다는 얘기지요.

영화를 보면서 소름이 쫙 끼치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 주 설교를 ‘소자 하나’로 하기로 이미 정해놓고 설교와 상관없이 영화를 봤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안토니오가 필라를 발가벗겨서 발코니로 내몰면서 “그렇게 너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고 싶으냐?”고 외치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입니다. 아하! 이게 두렵고 싫은 것이었구나! 아내가 자신의 이름을 갖고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그렇게 싫었던 거구나! 아내가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부엌에 숨겨두고 자기가 필요할 때 꺼내보는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인격을 가진 당당한 한 인간으로 세상에 나가는 것이 안토니오는 그토록 두렵고 싫었 던 거구나!

이름이 있는 대의(大義)라면 좋겠다!

선행을 하는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는 단지 그가 나오기 때문에 더 보고 싶어집니다. 선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그녀는 자기가 도와주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할 때마다 그 이름을 소리 내서 부르며 기도한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는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이 아니라 지금 밥을 굶고 있을 아무개, 병이 들었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는 아무개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여러분에게 생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고는 있지만 이름 없는 불특정 다수를 생각하는 것과 이름이 있는 구체적인 인격을 생각하는 것의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큼을 피부로 느껴보지는 못 했을지 모르니 한 번 더 들어도 상관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언자들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고아나 과부, 나그네 한 사람이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일어난다면 하늘이 뒤집힌다고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은 너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밥도 제대로 못 잡수신다고 믿었던 사람이 예언자들이란 말입니 다.

저는 미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의 입에서 ‘국익’이란 말이 나올 때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든지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든지 ‘국익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든지 하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 면 예쁘지 않은 말이 절로 입에서 나오려고 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국익’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얼굴 표정’이 없고 ‘삶의 이야기’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에는 살이 붙어 있지 않고 피가 돌지 않습니다. 생떼 같은 젊은이들을 의미도 없는 전쟁터에 몰아넣어 죽게 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국익이 도대체 무엇인지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노동인력을 비정규직으로, 해고로 몰아내놓고 지키겠다는 국익이 도대체 무엇인지 제 짧은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복지 예산을,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교육예산을 뭉텅이로 잘라놓고 무슨 국익을 어떻게 지키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은 사실 국익이 아닙니다. 그들이 지켜주려는 소수의 이익일 따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대의(大義)’를 내세워 무엇을 하자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자고 선동하는 말은 더더욱 안 믿습니다. 그렇게 대의를 위하려면 ‘당신부터 희생하세요!’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크게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소자’하나를 위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도 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겠는가 말입니다.

뜻을 크게 갖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큰 뜻 때문에 소자 하나에게 내밀 손이 없다면, 그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소자 하나를 끌어안아줄 가슴이 없다면 그 큰 뜻은 결국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이웃을 기만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욕보이는 죄임을 기억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실을 보여주시려고 그토록 안타깝게 ‘소자 하나’를 외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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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8)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양민 2009-07-11 11:36:23
우리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라는 말이 있지요.
진리를 내포하는 말에는
항상 촌철살인의 섬뜩함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246)
  "국익" 이란 없다 여몽 2009-07-08 21:28:32
어쩐지.... 저도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여러번 읽었읍니다. 그리고 "해방자 예수" 도... 목사님들이 그분같이만 말씀하시면 교회를 다시 다녀볼 생각도 있읍니다만...
추천0 반대0
(68.XXX.XXX.94)
  마지막 두 문단을 읽을 땐 원영범선 2009-07-08 18:21:48
눈물이 핑~도네요.
추천0 반대0
(66.XXX.XXX.164)
  댓글 안 달겠다고 했지만... 곽건용 2009-07-08 16:12:31
꼭 그럴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

작은 자에게 하는 일이 작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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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8)
  아, 다 읽었다.... 이경훈 2009-07-08 15:10:41
음...좋은 말씀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을 하지요. 옛날엔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피플들의 발목을 잡기 위한 고도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무릇 리더란 이래야한다고 보는 편. 가까운 곳에 손을 내밀고, 함께하고...해야지요.
추천0 반대0
(75.XXX.XXX.83)
  감동입니다 김한신 2009-07-08 14:51:40
오늘 글은 정말 감동입니다....
추천0 반대0
(65.XXX.XXX.103)
  작은 자를 도움에 대해! 김판건 2009-07-08 10:45:46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천국가는 참 방법이네요!
추천0 반대0
(205.XXX.XXX.237)
  지금까지 반 읽었는데요... 이경훈 2009-07-08 09:45:10
잠시 접고 오후에 또 도전하겠습니다. ㅋㅋㅋ.
추천0 반대0
(75.XXX.XXX.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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