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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마지막 귀향, 그 뜻을 새기다
퇴계 이황 선생 귀향길 450주년 재현 행사에 부쳐
2019년 04월 12일 (금) 12:54:02 이기룡 acroeditor@gmail.com

<퇴계(退溪) 이황 선생 마지막 귀향길 450주년 재현>행사의 출발지가 서울 봉은사라고 해서 불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도산서원-도산서원선비수련원(이사장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주관하는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식(告由式)을 겸한 개막식이 4월9일(화) 낮 서울 봉은사 보우당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도산서원 이용태 전 원장, 서울 봉은사 주지 원명스님, 문화재청 정재숙 청장과 예와 경(禮-敬)의 대표도시 안동 지역의 유림들과 정재계 출향민들이 넓은 법당을 가득 채우는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는 조정의 벼슬길을 스스로 마무리 지은 이황 선생이 ‘나의 고향 시냇가로 물러 갈 것’이란 뜻으로 지었다는 자신의 아호 ‘퇴계(退溪)’의 의미를 실행에 옮기려는 듯, 배와 말을 타고 고향으로 간 꼭 450년 전의 귀향길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선생이 남긴 시문을 읊는 시창(詩唱), 공연을 보며 대경세가의 노년 귀향길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길 위의 인문학적 콘서트를 연출한다는 계획이다.
 
"님의 마지막 歸鄕, 그 뜻을 새기다"라는 취지를 걸고 10일 봉은사를 출발하는 재현단은 미음나루(남양주 수석동)까지 19km를 걷는 것을 시작으로, 양수리-양평-여주-원주-충주-단양-죽령-풍기-영주를 거치는 남한강 길을 하루 20-30km씩을 걷고,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옛길 70km는 배를 타고 이동한 후 최종 목적지인 안동 도산서원까지 총 350km를 12일간 걷는 대장정에 나선다.

출발지가 봉은사로 정해진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인연과 의미가 있다. 조선조 중종(11대), 인종, 명종, 선조 등 4대에 걸친 조정의 부름으로 벼슬을 살았던 퇴계는 10여 차례의 사의 표명과 반려를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선조 임금의 윤허를 얻어 사직, 관복을 벗고 경복궁을 나와 굽이치는 한강줄기를 바라보며 한 정자에서 첫 날밤을 지낸 후 지금의 뚝섬이나, 또는 한남동 어디쯤의 나룻터에서 거룻배를 타고 다음날 찾아가 묵은 곳이 바로 봉은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당시 불교계는 조선조의 개국 통치이념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혹독한 멸실 위기를 겪으며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리던 때였다. 불교는 사람들을 미혹케 만드는, 그래서 사라져야 할 사회악쯤의 존재로 인식했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을 신호탄으로 한 억불정이 극에 달했을 때로, 절은 불태워지고 뜯겨졌고, 출가와 스님들의 도성 안 출입이 봉쇄됐고, 절집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끌려 다니며 관노로 살았다고 불가에서는 전해온다.
 
불교나 사찰을 욕보이는 것이 마치 배포가 큰 대인다움을 과시하는 것처럼 ‘완장질’을 하고 다니는 지방 관리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부처님의 가피였을까, 아니면 불교에서 말하는 ‘시절인연’이었을까?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재정적 후원을 받은 허응(虛應)당 보우(普雨)선사(1509-1565)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불교계는 제2의 중흥기를 잠깐 동안 맞게된다.
 
39살의 젊은 나이에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보우는 조선조에 와서 폐지되었던 도첩제와 ‘승과(僧科)’ 시험을 부활시켜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짐),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 또 백곡당(白谷堂) 처능(處能) 스님 등 당대 조선불교의 법맥을 이어나갈 총명한 선지식을 발굴, 후일 왜란 등 국난의 위기 마다 승의군을 조직해 호국불교의 선봉장이 되는 인재불사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모처럼의 기회 뒤의 위기가 너무 빨리 온 탓이었을까? 불교계를 전폭적으로 후원했던 문정왕후가 별세하자 숨죽이며 반전의 기회를 노리던 전국의 유림들과 조정의 관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보우대사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루에도 수십통의 상소문이 올라왔다는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전국의 도 단위, 또는 지역별로 사발통문을 돌리며 상소문 올릴 의견을 취합할 때 퇴계의 고향인 영남의 유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전해온다.
 
당시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도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 실천 방법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덕목으로 삼는 선비의 금도(襟度)를 보여주었다고 전해온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할 만큼 불교의 폐해가 크다면 스스로 소(疏)를 올릴 것이지, 통문까지 돌려가며 집단으로 대궐을 찾아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위를 설득하며, 나라의 존망과 유학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중차대한 사안도 아닌데 무성한 소문만으로 처벌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소신을 편 끝에 퇴계의 고향인 예안과 안동 지역의 선비들은 대궐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타 지역의 탄핵을 요구하는 유림들의 거센 청원은 집요하고도 강력하게 확산되어 보우선사는 끝내 유배형을 떠나 제주목사 변협의 묵시적 방조 아래 옥사했으며(1561년), 세간의 인연이 끊겨 돌보는 이 아무도 없는 탓으로 무주고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다 이슬처럼 사라져간 아픈 기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959년 보우대사의 문집이 일본에서 발굴되며 행장이나 당시의 정황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 현재도 재평가 작업이 진행 중이며, 2013년 초파일을 기해 서울 봉은사는 경내에 보우대사 청동좌상과 봉은탑을 세워 기리고 있다.)

   

그런데, 보우대사 순교 4년이 지난 1569년 벼슬길을 마감한 성리학의 대이론가 퇴계는 고향으로 가는 길에 보우가 주지로 주석했던 봉은사에서 하루 밤을 묵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조의 통치이념 기반을 수립한 퇴계가 유림과 조정에 미움을 사고, 요새 말로 ‘왕따’를 당한 끝에 유배지 제주에서 순교한 ‘봉은사 전 주지’가 주석했던 절집을 찾아와 하룻밤을 묶고 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 것이며, 그 무게가 얼마나 크겠는가.

여기서 불자로서의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그 큰 뜻을 유추해보려 한다. 혹여, 순전히 믿는 종교와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림들의 박해와 질시를 받고 유배형을 당한 끝에 옥사한 당대의 불세출의 스님에 대한 미안함의 표시는 아니었을까? 불교-유교라는 프레임만 벗기고 보면 39살의 나이에 봉은사 주지로 탄핵을 외치는 유림들과 세상을 상대로 불교를 구해내려다 죽음을 당할 만큼 ‘똑똑한 젊은’ 스님에 대한 인간적인 사과나 한 발 더 나간 해원이나 종교간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용단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 말이다.
 
여기서 퇴계의 금도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또 다른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 선생의 불교에 대한 ‘배은’의 처신이 주목을 끌게 된다. 모친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죽고 난 뒤에 19살 나이의 율곡은 금강산 마하연으로 ‘출가’했다고 한다. 마땅히 거두어주는 이가 없었거나, 거처가 여의치 못했을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불가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걸어 들어갔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과거시험에 아홉 번을 합격할 만큼 총명하고 뛰어났던 율곡인데 어느 누구의 조언에 휘둘렸겠는가. 아니면 외부의 강제력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겠는가. 단언컨대,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결정으로 ‘의암’이라는 불명(佛名)까지 얻어 ‘절밥’을 먹었다고 불가에 전해 내려온다.

율곡은 그러나 1년여 만에 하산했다고 한다. 그 때의 심경을 적은 글에 ‘胸中有山水(흉중유산수) 不必於此留(불필어차류)’ (내 가슴속에 산과 물이 있으니, 여기에 더 머물 필요가 없구나)라고 읆었다던가...

불자로서 주목하는 것은 입산과 하산 후 율곡의 언행의 돌변이다. 물론 입산했다 이게 아닌데 싶어, 또는 마음이 바뀌어 하산한다고 해서 용서받지 못할 큰 허물일 수는 없다.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다고 단칼로 자를 수는 없을지 모른다. 다만 후일 보우선사의 탄핵을 외치는 유림들의 빗발치는 상소대열에 편승했다는 사실을 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자기가 급할 때, 스스로 찾아가 임시 구난처로 삼았던 불교가 아닌가. 누군가, 아니면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찾아갔던 구난처인 불교를 ‘허명(許明)의 경지’ 어쩌고 하며 폄훼하고, 걸출한 스님을 유배형으로 내몰 것을 청원하는 상소대열에 앞장을 섰다는 것은 어떤 명분을 대더라도 궁색해 보이기 때문이다.
 
‘돌아서면서 먹던 샘물에 침을 뱉지 않는다’는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도 그렇고, 예와 덕(禮德)을 숭상하는 유교적 가치관으로 보거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야한다는 개혁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돌변하는 언행은 선비의 상식으로나 군자의 도리치고는 온당치 않아 보인다.
 
이 대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도산서원 및 도산서원선비수련원 김병일 이사장은 “퇴계선생이 남긴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고, 인생의 후반부에 삶의 의미를 찾는데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출발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퇴계 귀향길 재현의 출발 기점이 된 서울 봉은사의 주지 원명스님은 “퇴계 선생은 멸실 위기의 조선불교를 중흥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고 말하고 “오늘 행사가 열리는 이 법당의 당호 ‘보우당(普雨堂)’의 유래와도 무관치 않은 인연을 공유한다. 450년 전 퇴계 선생이 남긴 깊은 뜻을 살려 종교간의 화합과 상생을 이루어 가자”고 설명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유교와 불교의 흔치않은 만남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450년 전 퇴계선생이 보여준 유가의 포용력을 되살려 국가차원의 문화유산으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을 적극 뒷받침 하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퇴계선생 귀향길 출발>에 부쳐 ‘걷기 문화 컨텐츠 개발’의 가능성을 점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스페인의 가톨릭 성인의 위업을 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일본의 은둔형 외톨이 여행시인의 단가 형식의 하이쿠를 활용한 <바쇼(芭焦)의 길>, 걷기 문화의 한류화를 선언한 후 브랜드를 일본에 수출까지 해낸 <제주 올레>처럼 인문학적 가치와 걷기 문화의 스토리텔링을 접목시키면 뜻밖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올해 처음으로 실시되는 퇴계선생 귀향길 재현단에는 도산서원-도산서원선비수련원 김병일 단장을 비롯한 강구율 권갑현 권진호 김기현 김언종 김종성 남영종 문영동 박경환 유홍준 이기동 이동원 이동수 이동승 이상하 이은선 이한방 정순우 조용헌 황상희 등 도산학 연구의 권위자들이 참여하여 매일 걷는 일정이 끝난 후 학술강연 및 토론회, 詩唱 공연 등 길 위의 인문학 페스티벌이 다채롭게 펼져질 예정이다.

-문의: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필자 이기룡.
<포토에세이스트/포교사(대한불교조계종·봉은사)/헤피레그(시각장애인 마라톤)도우미/ 한국일보 사진부 차장(한국일보 견습29기) 역임 / gainnal01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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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이기룡 선생은? 아크로폴리스 타임즈 2019-04-12 08:27:02
이기룡 선생은 한국일보 견습 28기, 1972년 말에 한국일보에 입사했습니다. 저, 오달(김지영)도 견습 28기로 같은 때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진 기자로 뉴스의 현장에서 일을 하시다가 은퇴 후 불교 포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조선 유학자들이 천대하던 불교, 그 어려움 속에서 한 때때 불교 중흥을 이룬 보우 대사, 그래도 당시 최고의 유학자가 은퇴 여정의 시작을 강남 봉원사에서... 재미있는 구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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