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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의 거리... ‘겁’의 시간을 찾아서
[오달의 이 아침에] 요즘 세상, 소가 뛰겠네
2015년 12월 23일 (수) 14:05:12 김지영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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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소방네 소가 뛰었다."

내가 가장 어린 나이에 들은 사건 뉴스이다. 다섯 살 무렵이었다. 새참 '광우리'를 이고 논으로 가시는 외할머니를 졸졸 따라갔다. 뜬 모를 다시 심던 외할아버지가 논두렁으로 나오면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소가 뛰는 광경… 상상이었지만… 그 장면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요지경 속의 색동 조각처럼 현란하고 선명하게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다. 커다란 눈망울에 겁을 잔뜩 먹고 뜨거운 콧김을 뿜으면서 엇박자 네 발로 달린다. 일단 뛰기 시작했는데 어디로 갈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 제발 "날 좀 잡아주세요"하는 불쌍한 외침이 들린다.

덩치는 커도 천천히 걷는 게 소다. 이른 봄 다랭이 논에서 쓰레질을 하는 소걸음, 세상에 아직 "바쁘다"란 단어가 생겨나기 이전의 행보이다. 그런 소가 실제로 뛰는 일은 아주 드물다. 서부 영화에서 들소나 농장의 소 떼들이 집단으로 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거의 가족 대접을 받는 농사꾼들의 소는 언제나 묵묵히 소걸음을 걸을 따름이다.

그래서 고대 인도 사람들은 한결같은 소 걸음으로 거리를 가늠한다. 멍에를 멘 소 두 마리가 함께 하나의 달구지를 끌고 하루를 걷는 거리, 그것을 한 '유순(由旬, yojana)'이라고 한다. 지금의 셈법으로 하면 약 8마일, 13킬로미터 정도.

소 걸음은 시간 측정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로, 세로, 높이가 한 유순인 바위가 있다고 하자. 그 바위에 100년에 한 번씩 비단옷을 입은 선녀가 내려온다. 그 옷깃에 스쳐 바위가 닳는다. 그렇게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 그것을 겁(劫, kalpa)이라고 한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소는 사람 걸음걸이에 맞추어 걸었다. 어린 애가 소를 몰고 가면 어린이 보폭에 맞추어 가고 장정 앞에서 걸어가면 어른 발자국에 맞추어 걷는다. 코뚜레에 매어놓은 고삐에 매인 몸이라서 그럴까? 아니다. 소를 앞 세워 걸으며 사람이 고삐를 조이는 일은 별로 없다. 소는 뒤 따라 오는 사람의 보폭과 리듬을 잘 알고 있다.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의 생활도 바빠졌다. 사람이 뛰고, 소도 뛰고. 워낭 소리 짤랑대던 그 시대의 거리와 시간 감각은 엉클어져 버렸다. 이 시대의 속도감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은 뒤로 처진다. 같이 걸어 줄 소도 사라져 버린 후미진 구석으로.

말도 소를 따라 죽는다. '다랭이' '논 두렁' '뜬 모' 이런 단어들이 한지에 먹물 스며들 듯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던 시절, 그때 저장했던 한가로운 단어들… 새참(끼니 사이의 간식), 광우리(광주리), 새뱅이(새우), 깨구락지(개구리), 토깽이(토끼), 멍에, 쓰레질…. 지금도 내 의식의 밑바닥을 훑으면 개울가 새뱅이처럼 걸려 나온다. 그런데 막상 고향 마을에 가보면 다 없다. 사람들만 뜀박질한다. 소가 있다면 사람들 리듬에 맞추어 뛰어야 할 터이다.

한 유순의 길이가 늘어난다. 한 겁이 품는 겁나는 시간도 길어진다. 사건이다. 내 기억 속의 소는 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슬도 한 때가…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 卽一念) 무량한 긴 세월이 한 찰나의 일념이고

   
연꽃 진 자리에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담겨 있고

오달 김지영 (영어교육 69, 변호사, 수필가) *LA 중앙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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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3)
  오달님 사진 김종하 2015-12-23 14:45:45
추가했습니다. 사진설명은 의상대사의 법성계에서 따오셨다고... 예술과 통찰의 깊이...
추천0 반대0
(76.XXX.XXX.131)
  감사합니다. 오달 2015-12-23 15:36:36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 Willaim Blake
추천0 반대0
(104.XXX.XXX.245)
  억겁의 세월 김종하 2015-12-22 21:10:26
그 겁을 측정하는데 기본 단위가 소 걸음이란 걸 첨 알았습니다.
묵묵한 소 걸음을 다시 생각케 하는 칼럼 감사~
추천0 반대0
(76.XXX.XXX.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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