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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없다. 세월만 있을 뿐…"
[인종의 노스탤지어] 살아나는 과거들 3&4 - 폭력의 시대
2015년 06월 08일 (월) 03:00:09 김인종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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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폭력의 시대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오월의 노래...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너드(nerd)적으로 생긴 이 후배(광주출신으로 기억한다)는 2절까지 외우라며 자꾸 반복을 시켰는데 가사가 너무 절절하고 가슴아파 외우기를 포기했었다. 그는 같은 방을 쓰던 후배 '온'의 친구였다. 말라푼다를 해보겠다고 찾아왔었는데 너무 학삐리였다.

말라푼다(Malapunda)는 서울대 농대에만 있던 괴이한(?) 학생 서클이었다. 60년대 수원 깡패들의 횡포에 대항해 조직된 자경단이다. 새학기 시작때 지방에서 수업료 들고 학교로 오던 학생들이 역전에서 깡패들에게 자주 털렸다. 수원시내에서도 봉변을 당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힘께나 쓰는 운동부, 태권도부원들, 혹은 깡다귀 좋은 학생들이 모여 '말라푼다'를 만들었다. 농대학생들이 어디서 당하고 있으면 기숙사에서 비상방송이 나가고 말라푼다 멤버들은 나무 침대에서 각목 하나씩을 뽑아들고 역전으로, 시내로 달려나갔다.

   
서울농대 '말라푼다'의 쟁쟁한 멤버들 - 감히 풍운아들의 젊음을 살았다고 증언한다. (편집자 퀴즈-필자는 어디에? 너무 쉽나요^^?)

말라푼다란 싹쓸고 지나가는 불개미 종류이름이다. 학교에서도 이 조직을 인정하고 지도교수님(깡이 좋은)도 있었다. 멤버들은 명예롭게 생각했다. 70년대, 80년대 들어서면서 치안이 좋아지고 말라푼다는 할 일이 별로 없어졌다. 모이면 밤새 술먹고 기행을 일삼았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권투 글러브들을 던져 놓고 싸우게 했다. 한 후배와 권투 격투기(?)가 붙었는데, 한참 치고받는 중에 선배가 나를 떼어 놓으며 소리쳤다. 후배를 그리 패면 어떡하냐? 번쩍 정신이 들면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치사한 놈이 될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 고상한 척, 의로운 척 하지만 대부분 인간들이 한꺼풀 벗겨지면 그 이기적 본색들이 나온다.

말라푼다 멤버들 별명에는 개**, 칼**, 또** 가 많았다. '또'는 또 사고 쳤냐?에서 나온 별명이다. 다른 학생들은 점점 말라푼다를 피했다(그래서 자신이 말라푼다 멤버라는 것을 가급적 공개않는다). 교내 혹은 교외 폭력사건에 연루돼 중징계를 받은 멤버들도 나왔다.

한때 조직(?)의 코드를 잘 따르지 않아 빳다 50대를 맞은 적이 있다. 미식축구부원실에서 걸레자루로 5명의 선배들에게 10대씩 맞았다. 걸레자루가 모두 부러졌다. 엉덩이는 피떡이 되고 팬티가 눌러붙었다. 엄살한번 없이 꼿꼿이 서서 맞은 나도 독한 놈이었다. 다 패고 나서는 "미안하다"고 했다. 샌드패블즈 선배가 내 엉덩이를 보고는 "이새끼들이.." 하며 달려가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당시 나는 샌드페블즈 4대 리드기타를 맡고 있었다).

70년대말 ,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말라푼다 내에서 '이념화'된 멤버들이 나타났다. 그중에 같은 과 동기로서 가장 친했던 죽마고우 '황'은 이념조직의 두목급으로 크고 있었다. 함께 자취생활도 했다(농대생들은 자취파와 통학파가 있다. 서울 출신들은 주로 전철을 이용해 통학했지만, 자취파도 꽤 있었다). 말라푼다 멤버이며 나를 아끼던 깨비형도 지하 학생운동에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때인가는 시골 구석마을로 숨듯이 찾아가 원두막에서 백기완씨(민중, 노동운동가)의 강연도 여러차례 들었다. 여전히 나는 민중, 노동, 통일운동에는 정이 안갔다. 너무 따분했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종로 2가 구석 골목의 아지트 '콩나물 국밥집'을 찾아갔다. 깨비형이 여자친구와 하는 밥집이었다(몇년전 서울방문시에 비슷한 위치에 있는 국밥집을 보고 너무 반가와 사진을 찍었지만 예전의 그집은 아닌 것 같다).

   
종로 2가 구석에 있었던 우리의 아지트 콩나물 국밥집, 비슷한 위치인데 이렇게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었다.

80년대초? 어느날 캠퍼스에 몇년전 졸업한 말라푼다 선배가 나타났다. 말라푼다에서 날리던 선배였다. 가끔 본관 앞잔디에도 앉아 있었다. ... 중정(중앙정보부)에서 파견나왔대. 그당시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내가 대학원을 갈 때 죽마고우 '황'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미국? 유학? 너한테 안어울리는데. '황'은 뉴욕으로 갔다. 얼마후 연락이 왔다. 뉴욕대학 어디 나무 아래서 어떤 여자하고 결혼했단다. 결혼식에 둘만 있었단다. 얼마후 또 연락이 왔다. 와이프 임신했단다.

얼마후 '황'은 한국을 잠깐 들렀다. 술집에서 '동지'들과 만나 반가운 잔을 나누는데 그의 얼굴이 자꾸 까맣게 보였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눈을 자꾸 부비고 봐도 그의 얼굴과 주변이 까맸다. 죽은 사람의 얼굴같았다.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몇년전 내가 학교에서 사고치고 학장님의 권유(?)로 군대를 가기로 하고 집으로 갈 때 길이 온통 빨갰었다. 저녁 때도 아니고 주변에 빨간 색들도 없었는데..내눈이 이상한 가? 그때도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었다.

며칠후 '황'은 체포됐다. 일명 '유학생 간첩단 사건'. 신문 1면에 크게 떴다. 수십명의 '간첩'이 사진과 함께 나왔다. 내 친구 '황'의 사진과 이름 석자도 거기 있었다. '황'이 간첩이라고? 에라 이 개자식들아. 니들이 꼭 이 업보를 되받을꺼다. 이**들아. 그 무지한 정권과 하수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거란 저주 밖에 없었다.

'황'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여동생도, 그리고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황'의 부인. 세상은 어두웠다...황의 가족은 많은 재산을 들여 황의 감형에 매달렸다. 얼마후 '황'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리고 나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 * *

4부-폭력의 군대

논산 훈련소에서 뻘뻘 기다가 자대 배치 받은 첫날. 내무반에 얌전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어떤 상병'으로부터 호발나게 맞았다. 주먹, 구둣발, 옆차기, 돌려차기 .. 그게 신고식이라는거. 맞으면서 어? 어? 이게 아닌데.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계획한게 '저 새끼 오늘 죽이자'. 밤에 그 폭력상병이 변소를 갈 때 몰래 따라가서 거기서 끝장을 내주자라고 계획했다. 그 '어떤상병'이 오줌을 눌 때 뒷통수를 갈겨버리는 거다. 미리 변소에 가서 답사를 하며 사용할 흉기(?)도 현장에 물색해 두었다.

기대와 흥분으로 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어떤 상병'이 저녁먹은 후 나를 불렀다. "괜찮나? 군대 시작이 다 그런기라. 잊어뿌라"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학생시절 '폼생폼사'의 신조(?)로 버티던 젊음이 군대라는 폭력조직에서 이렇게 무너지나? 그리고 괜찮냐고?

그날밤 그 '어떤 상병'이 변소를 갈 때 슬슬 쫓아갔다. 그리고 옆에 서서 같이 오줌을 누고 나왔다. 그 상병은 두번 다시 나를 때리지 않았다.

77년인가? 군대 내무반에서 MBC 대학가요제 1회 대회 방송을 듣고 있었다. 후배 샌드페블즈 6대가 '나 어떡해' 라는 노래로 참가해 연주 노래하는 걸 들었다. 노래가 그런대로 안정, 연주는 수준급. 입상권에는 들겠군. 결과끝까지 듣지 못하고 보초를 나갔다. 보초를 서고 들어오니 내무반에 있던 막내 일병이 '상병님, 샌드페블즈가 대상 먹었어요' 라고 흥분하며 알려줬다.

그후 소식을 들으니 수원의 서울농대 캠퍼스로 오는 우편의 반이상이 샌드페블즈에게 오는 팬레터였다고 한다. 우편배달부가 매일 푸대자루로 쏟아놓고 갔단다. 노래를 부른 병섭이 하숙방으로는 여고생들이 찾아오고, 편지들이 하루 수십통씩 쏟아졌단다.

   
농대 강당, 신입생 환영회 샌드 페블즈 공연.

제대한 후 복학한 어느해. 후배가 '대학신문(서울대학교 신문)'을 들고 왔다. "저희를 이상하게 썼어요." - 샌드페블즈 같은 그룹사운드 음악은 미제국주의, 식민문화의 앞잡이로서 민중의 의식을 흐리게 하고...우리 민족의 음악, 놀이를 찾자..뭐 대충 이런 내용의 기사였다. 김일성식 민족주체사상에 영향받은 운동권 학생 기자였을 것이다. 당시 한창 붐이 일던 모택동사상 따르기, 홍위병식 문화혁명의 캠페인이 학생운동에 포함됐었다.

가만있을까 하다가 기사를 써들고 관악캠퍼스의 대학신문을 찾아갔다. 편집장이 나왔다. 너나 나나 같은 밥솥 식구인데 뭐하러 이런 기사를 내보내냐? Poker face의 편집장에게 내가 쓴 글을 주었고 다음호 대학신문에 실렸다. 그러면 갓쓰고 한복입고 다니랴? 가야금 뜯고 장구치며 놀까? 자세히 기억은 없지만 이런 투로 썼다.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신문, 2015년 5월18일자는 1면탑 사진이 전자음악에 맞춰 신나게 흔들며 환호하는 2015 대학 봄축제의 모습(아래 사진)이다. 서울대학내의 여러 그룹사운드, 힙합 그룹들이 나와 그옛날의 '미제국주의 식민문화'에 열광한다.

진리는 없다. 세월만 있을 뿐이다.

   
대학신문 2015년 5월호, 전자음악에 맞춘 열광으로 봄축제를 벌이는 모습.

전두환 정권의 출범이후 학생과 노동, 재야 운동권은 더 과격해졌다. 데모는 계속되고 학교 수업은 수시로 문을 닫았다. 어느때 학교에 철모쓴 군인들이 들어와 있을 때, 우리는 연습실 악기들을 밖으로 옮겨내며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청춘과 대학생활에 혼란스러웠다.

서울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의 데모 모습은 '봉화 올리기'로 그려진다. 먼저 학생운동의 이론적 근거지인 문리대에서 그날 시위의 대의와 목적을 천명하는 격문이 각 단과대학 학생회로 연락이 되면서 동숭동 문리대에서 봉화의 첫불(시위시작)이 올라온다. 그러면 저 배밭이 많이 있던 공릉동 공대 캠퍼스에서 봉홧불이 뜬다. 거의 같은 시각 수원의 농대에서도 봉홧불이 오른다.

이렇게 서울대가 시위의 첫 불을 올리면 연세대, 고려대의 봉홧불이 올려진다. 경찰은 학생들의 도심진입을 막기위해 공릉동 공대의 버스노선을 끊고 학생들의 발을 묶어 버린다. 수원역과 버스정거장에서는 대학생 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무조건 닭장속 경찰버스에 싣는다.

어떤 때 농대가 서울 종로로 진출하기로 했다. 수원에서의 무차별 경찰검거망을 뚫고 종로에 도착한 우리들은 골목에 대기하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모여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한다. "차도는 나가지마, 찻길은 막지말아" 그와중에도 일반시민에게 피해를 안주려는 학생들의 애절한 외침들.

경찰이 쫓아오면 흩어지고... 연세대는 신촌에서 서울역쪽으로 진출했단다. 서울공대는 공릉동 캠퍼스에서 원천 봉쇄됐단다. 문리대는 종로 5가를 뚫고 온단다. 결국은 최루탄이 요란하게 서울시내를 눈,코터지는 냄새와 흰색 연기로 채우고.. 교수님들, 학생과장, 학장님들이 길로 나선다.

서울대 버스가 길에 서있고 교수님들이 "이제 의사표시했으니 얘들아 가자, 제발 가자" 형님이, 아버지가 끌 뜻 교수님들이 학생들을 끌어 학교버스에 태운다. 우리는 종로에서, 수원시내에서 곧잘 교수님들과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왔다.

여러 캠퍼스가 있는 서울대의 게릴라식 시위. 유신정권은 골치아팠다. 그래서인가? 서울대학교 각 캠퍼스들은 뭉뚱 그려저서 저 신림동 관악산으로 던져졌다. 좋은 말로 관악 종합캠퍼스.

   
동숭동 문리대에서의 신입생 입학식때.우측이 필자. 좌측 의대생 친구, 중간 공대생 친구. 서울대학교 캠퍼스들은 서울시내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뛰어서 10분 거리. 화동 1번지에 경기중고등학교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때는 고등학생들도 시위를 자주했다. 경기고등학교가 횃불을 들면, 가회동의 중앙고등학교, 경복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들이 잇달아 시위에 나섰다. 경기고등학교 반장이었던 나의 형은 의자로 교실문을 막고 학생들과 함께 단식투쟁을 하고 엄마가 교실로 찾아가 울면서 애원해 형을 끌어내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은 교문을 돌파하면 학교 앞의 경복궁 옆길로 나와 곧장 청와대로 스크럼을 짜고 올라갔다. 청와대에서 보면 경기중고등학교는 눈엣 가시였을게다.

정권은 화동1번지 경기중고등학교를 폐쇄하고 그곳에 도서관을 지어버렸다. 경기중고등학교는 어디 저 강남 어딘가로 던져졌다. 추측일지 모르지만, 청와대로 올라가는 경기고등학교 시위대, 그 때문에 유신정권은 경기고등학교를 영광(감히 말하기를)의 역사에서 퇴출시켰다고 나는 믿는다.

폭력의 시대. 주먹의 시대.

그시절 우리는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곧잘 쌈질을 했다. 골목에는 막걸리, 소주를 팔면서 고고장들이 가득했다.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패싸움이 되고, 어느땐가 그때 말로 '토끼지 못한' 우리 3명이 체포(?)됐다. 경찰들이 감당을 못하자 방범대원 4명이 나에게 달라들더니 혁대를 휙 잡아 빼내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러니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폭력범(?)으로 검찰청에들 갔다.

우리 3명이 담당 검사 앞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검사가 소리쳤다. "다리똑바로 하고 앉아. 이새꺄"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로 알고 있는 검사님한테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몇시간후 우리 조서를 보고 난 검사님 왈, "학생들이 웬 쌈질들이냐, 공부나 하지. 니들 한테 맞은 애들은 프로들야. 치료비내고 합의해라." 그 검사님은 우리를 기소하지 않았다. 상대편을 설득해서 당시 합의금 30만원으로 마무리했다. 검사님은 서울대학교 선배였다. "선배님, 저희 유학도 가고 이민도 가야 하는데.." "알았어"

그후 떼어 본 우리의 신상조회서는 너무나 깨끗해서 유학과 이민서류 작성에 아무런 결격사유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부르조아에 속했다.

폭력의 시대는 차츰 계절을 바꾸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미국행을 준비했다. 무기징역형을 받은 '황'에게서는 절망적인 소식만 들려왔다. 감옥에서도 1인 투쟁을 하고 있었다. '개전의 정'을 보이면 형기도 감소시키고 사면할 수도 있다는데 친구 황은 타협하지 않았다. 감옥에서도 또 조직을 모으고 있단다.

노태우 정권에서도, 김영삼 정권에서도 그는 감옥에 있었다. 그의 꽃다운 젊음이 감옥의 어두운 방에서 스러지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to be continued...)

김인종 (농대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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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7)
  반가운 얼굴들 임원택 2016-11-07 20:22:21
37년 전으로 돌아가 행복한 기억이었습니다.
귀국하시면 쏘주한잔 하시게요. 01032645441
추천0 반대0
(117.XXX.XXX.102)
  사진에 있는 분들 다 아는 사람 김윤정 2016-11-07 18:37:23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종각옆의 콩나물집도 새록새록입니다.
추천0 반대0
(207.XXX.XXX.138)
  인물찾기 넘 쉬운데요 박변 2015-06-08 20:10:57
한 복판. 제일 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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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XXX.XXX.53)
  아랫줄 오른쪽 교련복 김인종 2015-06-09 20:40:58
나 미남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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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XXX.XXX.151)
  에이 지가 기면서 박변 2015-06-10 20:50:17
정녕 아니란 말씀입니까...이럴 수가..확신했는데...그 사진만 이상하게 나왔슈
추천0 반대0
(138.XXX.XXX.53)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 박찬민 2015-06-08 07:58:06
행동하는 지성.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 사는 지금 21세기에서는 먼 옜날의 추억인 타인과의 유대. 기쁨도 고통도 다 지난 날의 이야기입니다.
추천0 반대0
(45.XXX.XXX.128)
  말라푼다! 김종하 2015-06-08 01:06:44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아크로 역사상 형언할 수 없는 역작'이 (페북에서) 급 드라마틱 전개로 치닫고 있어서 뭉뚱그려 업뎃 했습니다.^^
추천0 반대0
(107.XXX.XXX.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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