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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 오델로, 그들이 남이가?
[오달의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이민자,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2015년 02월 25일 (수) 14:05:19 김지영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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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오델로, 베니스의 성공한 이방인
 
“오델로라는 인간으로 살아왔던 그 사람을 찾나요?
그 사람 [이미 오델로가 아니지만] 여기 있어요.”
 
“That’s he that was Othello. Here I am.”
 
셰익스피어의 비극 ‘베니스의 무어인, 오델로의 비극’(The Tragedies of Othello, the Moor of Venice) 연극의 마지막 장, 5막 2장에 나오는 대사다. 베니스 공화국의 명장 오델로가 아내 데스데모나(Desdemona)를 죽이고 나서 비로소 다시 이방인이 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깨닫는 장면이다.
 
오델로 그는 무어인인다. 무어인은 아프리카 북부 지역의 아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셰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쓴 16세기 말에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흑인을 지칭하기도 했다. 오델로는 당시 베니스 공화국의 영토였던 사이프러스 총독으로 발탁 되어 오토만 터크의 침공을 막아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을 만큼 성공한 이민자이다. 무관으로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사십대의 그는 아직 이십이 안 된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차지한다.
 
얼굴이 검은 오델로와 하얀 대리석 같은(monumental alabaster) 데스데모나의 결혼, 그것은 이방인에게는 현실의 벽이었다. 베니스 원로원 의원이며 최상류 실력자이었던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Brabantio)가 반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데스데모나는 몰래 집을 떠나 오델로에게 간다. 그리고 둘은 비밀 결혼을 한다.
 
오델로와 데스데모나의 흑백 결혼은 베니스의 상류 시민으로 성공한 이방인의 몰락의 단초가 된다. 오델로 자신이 꽉 잡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의 수하에서 배반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다. 베니스 인 이아고(Iago), 그가 오델로가 검은 무어인이라는 인종적 이질감을 간교하게 부각시킨다. 그리고 인종 문제, 신분 문제에 관해 자신감이 넘치던 오델로의 에고를 집요하게 허물어 버린다.

연극은 이아고와 로드리고가 브라반시오를 한밤중에 깨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아고는 오델로가 자신을 제치고 플로렌스 출신 카시오(Casio)를 부관으로 임명하자 오델로에 대한 평소의 반감을 표출한다. 로드리고는 그가 사랑하는 데스데모나가 오델로가 결혼하자 오델로를 미워하게 된다. 그들이 오델로에 대한 미움의 구체적 모티브는 오델로가 이민족 출신 흑인이라는 것이다.
 
이아고가 브라반시오에게 “당신 딸을 도둑맞았다”고 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 늙은 검둥이 숫염소가 순백의 어린양을 덮치고 있다. (Even now, now, now, an old black ram is topping a white yew.)”
 
“당신 딸 위에 바바리(Barbary,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말)의 말이 올라탄다… 그래서 당신의 손자들은 사람 말(언어)을 못하고 말처럼 힝힝거릴 것이다.” (… you’ll have your daughter covered with a Barbary horse. You’ll have your nephews [=grandsons] neigh to you.)
 
오델로는 공식적으로는 존경받는 베니스 공화국의 장군이지만, 이아고에게는 백인 여자를 덮치는 짐승, 늙은 검은 숫염소이고 아프리카의 말일 뿐이다. 장군으로서의 오델로를 여러 번 집에 초대했던 브라반시오도 딸 데스데모나가 오델로와 정분이 나자 오델로를 더러운 흑인으로 보게 된다. 브라반시오는 흑인 오델로가 백인 데스데모나와 결혼한다는 것은 범죄라고 주장한다.
 
오델로는 이 때만해도 자신에 차 있다. 베니스의 상류층으로 그의 지위는 확고하다고 생각한다. 오델로는 자신의 당당한 입장을 이렇게 말한다.
 
“내가 베니스 공화국에 공헌한 일이 브라반시오의 불평을 뛰어넘는다. 나에게도 아프리카의 왕족의 피가 흐른다. … 데스데모나에게 걸맞는 귀족이다.” “나의 지위나 권리 그리고 완전한 영혼으로 보아 내가 이길것이다. (My parts, my title and my perfect soul shall manifest me rightly.)”
 
오델로 그는 영혼까지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완전한 영혼(perfect soul)이란 잘못이 없다(innocent)의 뜻이기도 하지만 베니스 사람으로서의 완전성, 즉 종교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이민족 출신 오델로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백인 베니스 시민과 똑같은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다. 오델로는 철저한 베니스인이 되었다고 자각한다.
 
브라반시오는 베니스 원로원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믿는다. 그러나 데스데모나가 아버지 대신 남편 오델로를 택한다는 증언을 듣고 오델로의 손을 들어준다. 당시 사이프러스가 공격을 받는 위기 상황에서 오델로가 꼭 필요했던 실용적 필요도 고려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델로는 사이프러스 총독으로 가게 된다. 데스데모나도 따라간다.

무대가 사이프러스로 옮겨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베니스의 상류 시민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이 확고했던 오델로는 이아고의 계략에 말려들면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서서히 잃어간다.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부장 카시오와 정사를 하고 있다는 허구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된다. 오델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인종적 이질감을 느낀다.
 
연극 3막 3장에서 오델로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흑인이라서? 내가 베니스 궁정의 사람들과 같이 세련되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늙어서?”
 
오델로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버리고 카시오와 ‘바람이 난’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아고가 조금씩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심어주는 의심의 씨앗이 걷잡을 수 없는 질투의 올가미가 되어 오델로의 인격을 말살한다. 오델로는 이아고의 저주대로 짐승이 되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다.
 
오델로가 근거 없는 질투 때문에 인성을 잃었지만, 베니스인의 완전한 영혼을 갖기 위해 택한 기독교인으로서 형식적 윤리의 틀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다.
 
데스데모나를 죽이기 전에 그는 데스데모나에게 묻는다. “오늘 밤 기도는 했나?” 그리고 말한다.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안 했다면 지금 당장 용서의 기도를 해라.” “기도는 짧게 해라. 잠시 기다리겠다. 준비되지 않은 영혼을 죽이진 않겠다. 당신을 죽여서 당신을 지옥에 보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오델로는 기독교적인 영혼의 심판관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데스데모나를 죽인 다음에 데스데모나가 카시오와 정사를 했다는 허구가 이아고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그 계략에 말려든 바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가 백인들과 똑같은 베니스인으로서의 정체성 그 자체도 허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베니스의 장군 오델로로 살아왔던 그는 이제 홀로된 이방인인 그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델로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가 알레포에서 사악한 터크와 싸울 때 그놈, 그 개 같은 놈의 목을 잡고 이렇게 죽였지. (… I took by the throat the circumcised dog, and smote him, thus.)”
 
그렇게 말하면서 당시 이방인 이교도 터크를 죽일 때 하던 것과 똑같이 칼로 자신을 찌르고 자살한다. 오델로는 베니스의 장군이 아니라 이교도 이방인으로 죽은 것이다.

   
Desdemona and Othello, by Antonio Muñoz Degrain <출처 Wikipedia>


II. 샤일록, 베니스의 박해받는 이방인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Shylock)의 비극은 오델로의 비극과 대조적이다. 샤일록은 자신의 정체성을 당시 베니스인과 다른 유태인으로 인식한다. 연극 말미에 그가 기독교로 개종을 해야 한다는 형벌을 받든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했다는 후일담은 없다.
 
샤일록은 베니스에서 대부업을 하는 사람이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는 이자를 받고 돈을 꿔주는 유태인을 멸시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샤일록에게 욕하고 침을 뱉는다. 안토니오의 친구 바사니오는 포시아(Portia)와 결혼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안토니오에게 어렵게 이야기 했지만 안토니오가 당시 현금이 없다. 그래서 샤일록에게 간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보증을 받고 바사니오에게 3,000두캇을 빌려준다. 보증의 조건은 90일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도려낸다는 것이다.
 
안토니오의 무역선이 제때에 돌아오지 못하자,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한다. 안토니오는 감옥에 갇히고, 샤일록은 계약의 조건 대로 이행을 하게 해달라는 재판을 신청한다. 안토니오의 친구들이 샤일록에게 간청한다. 돈을 두 배로 갚을 테니 안토니오를 석방시켜 달라고. 
 
연극 3막 1장,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샤일록은 이렇게 대답한다.
 
“낚싯밥으로 쓰지. 아무도 그 살을 먹지 않는다면 내 복수에게 그 살을 먹일 걸세… 안토니오는 내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조롱했고, 유태족 전체를 욕했고, 내 사업을 방해했고, 나에게 침을 뱉었다. … 유태인에게는 눈이 없냐 손이 없냐. 유태인에게는 몸도 없고, 오감도 없고, 감정도 없고, 정열도 없다더냐? … 유태인도 찌르면 피가 나고, 간질이면 웃는다. 당신들이 우리들을 사악하게 대하면, 우리도 복수를 한다.”
 
그래서 이 문제는 재판에 넘어간다. 바사니오와 이미 결혼한 포시아가 저명한 법률학자 행세를 하며 재판장이 된다. 포시아는 안토니오와의 보증 계약이 유효하다고 판결한다. 당시 베니스가 국제적 상업도시이기 때문에 계약이 유효하지 않다는 판결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샤일록은 계약대로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베어 낼 권리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샤일록이 명판결이라고 칭찬을 한다.
 
그러나 상황은 반전. 계약에 명시되지 않은 피 한 방울도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파운드에서 조금이라도 모자라거나 넘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샤일록은 이기고도 진 것이다. 샤일록이 포기를 하고 나가려는 순간, 또 하나의 형벌,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 죄로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재산 반은 안토니오에게 반은 국가에게로.
 
안토니오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을 안 받을 테니, 샤일록이 죽으면 그 몫을 샤일록을 버리고 기독교인에게 시집간 딸 제시카에게 주고, 샤일록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재판장은 그대로 판결, 샤일록은 졸지에 기독교로 개종해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샤일록은 끝까지 자신이 베니스에 사는 이방인, 유태인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베니스 사회는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라는 형벌을 내린다. 그러나 샤일록이 실제로 개종을 하거나 베니스의 시민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베니스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하지 않던 오델로와는 다른 이방인의 삶이다. 오델로는 확실한 동화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이 된다. 데스데모나를 죽이면서도 그는 그의 살인이 기독교적에 악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베니스의 상인’ 중

III. 이방인으로 사는 법
 
오델로의 방식도 샤일록의 방식도 둘 다 비극으로 끝난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근본적인 불안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터키 치하의 아르메니아인, 독일의 유태인, 재일 한국인, 미국에 사는 소수민족들, 오늘 유럽에서 살고 있는 유태인 이들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차별 또는 차별의 징후를 겪고 있다.
 
사회가 안정이 되어 있을 때는 오델로의 방식이 안전하다. 오델로도 베니스 시내에서는 그의 공헌과 능력을 인정받는다. 백인과의 결혼 문제로 원로원의 심판을 받지만 법에 따라 원로원은 오델로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혼돈 상태의 외곽, 사이프러스에 와서는 달라진다. 사이프러스가 차라리 전쟁 상태였다면 오델로는 그의 능력으로 상황을 휘어잡았겠지만, 터키 침공군은 사이프러스에 오기 전에 폭풍으로 전멸한다. 제도권 바깥에서 오델로는 외톨이가 되고, 이아고의 간교에 말려든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샤일록 방식으로 사는 이방인에게는 가혹한 시련이 있다. 안정된 사회는 이방인에게도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 따를 것을 강요한다. 샤일록은 안정된 사회의 법률의 보호를 받지만, 또한 그 법률의 올가미에 걸린다. 마지막으로는 개종을 강요당한다.

오델로도 샤일록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샤일록의 비극은 현실적인 비극이지만 그의 내면적 갈등은 아니다. 그는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개종하는 척 했을 수는 있지만, 끝까지 ‘나는 나다’라는 자각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델로는 베니스의 장군, 베니스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나서 ‘나는 나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오델로가 베니스 시민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아예 잃어버렸었다면 그건 오델로에게 현실적이고 내면적인 비극이다.
 
이민자들이 타향에서 ‘나는 나다’라는 자각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이민자들의 모집단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힘이다. ‘나는 나다’라는 말에서 두 번째 ‘나’는 나의 선조들이 만들어서 물려준 문화와 역사이다. 유태인이나 중국인이 어느 땅에 가서 최저 하층민 생활을 해도 여러 대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반대로 여진족의 경우 청나라의 왕족이나 지배계급으로 중원에 진출하지만 몇 대 못가서 중국인으로 동화되어 버려 지금은 민족으로서의 존재감마저 잃어버렸다. 
 
지금 미국에 사는 우리 한국인들은 ‘나는 나다’라고 붙들고 있을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를 붙드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미국에서 살아가야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그 ‘나’를 어떻게 살찌울 것인가?
 
오델로와 샤일록의 비극. 이민자로서 타향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의 비극을 그들 자신의 결함의 결과나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샤일록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이라고 욕만 할께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그의 싸움에 격려를 보내야 한다. 오델로를 죄 없는 마누라를 죽인 짐승 같은 놈이라고 비난하지 말고 베니스 사회에 완전 동화하겠다는 허구를 확신한 이방인에게 연민이라도 보내자.

오달 김지영 (영어교육 69, 변호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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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2)
  유태인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유태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독특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변변 2015-02-25 07:10:09
제가 로스쿨 다닐 때 교수들 상당수가 유태인이라 유태인의 휴일에는 수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4 분의 1 이 쉰다는 구정 (Chinese New Year) 는 지금도 학교는 열리고 정상적으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인 유태인들이 미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시아 사람들도 합심하여 문화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일에는 목소리를 높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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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XXX.XXX.143)
  '나는 나다' 김종하 2015-02-24 21:14:58
셰익스피어 작품에 비춰보는 이민자의 삶... 나를 나이게 하는 문화의 힘... 어려운 주제이지만 이민의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저의 모습을 다시금 성찰케 합니다.
이 글은 오달님께서 아크로 인문강좌와 LA 한인수필가협회에서 강의하신 내용을 기고해주신 것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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