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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용' '남은 것' 'available'
[샘콩의 디지털 세상] 미국에서 한글 소프트웨어 만들기
2014년 12월 23일 (화) 01:39:50 공성식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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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글로 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은 좀 특별한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한국어 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치고 직장생활도 몇 년 하다가 미국에 온  사람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영어를 주로 쓰고 한글은 겨우 읽을까 말까 한 사람까지 섞여있으니,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져 있는 수준의 폭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소프트웨어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그 중 어떤 수준에 맞춰져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안 그래도 복잡한 프로그래밍에서 또하나의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고객사에서 요청한 직원관리 시스템을 만들던 중 겪었던 일이다. 휴가관리 페이지에서 각 직원별로 휴가일수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기본 + 이월 - 사용 = 가용] 의 공식에 따라 항목별 일수를 표시했다. 그런데 담당자가 '가용'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이 많을 것 같다며 난색을 표했다. 물론 '남은 휴가일수'라는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어째 다른 단어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주저했다. 그랬더니만 그냥 영어로 Available 이라고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영어 단어는 이해할 테니 모두를 만족스럽게 할 거라는 의견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글로 된 시스템을 만드는데 이 정도의 용어조차 제대로 표현을 못해 영어와 섞어쓴다면 무슨 낯으로 세종대왕님을 뵐 수 있을까?

이 일을 계기로 우선 내 자신의 우리말 사용능력을 점검하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이오덕 선생님의 책 '우리글 바로쓰기'를 구입했다. 이 책의 머리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을 마음대로 마구 토해내는 사람, 그렇게 토해내는 말들이 모두 살아 있는 구수한 우리 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아주 쉬운 말로만 돼 있으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힘이 있는 문장이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내가 하는 오염된 말을 들으셨다면 어떠셨을지 생각하니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의 들어가는 글의 제목은 '들온말 가려내어 우리 말을 깨끗이'로 돼 있다. 남의 나라 말을 생각 없이 마구 쓰는 것이 우리 정신을 짓밟는 바보스런 노릇이라며 중국글자말, 일본말, 서양말 이 세 가지를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로 꼽으셨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서 내가 쓰는 말을 살펴보니 정말 들온말 투성이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 채 써왔다는 점이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 프로그래머로 지내며 다양한 프로그래밍 관련 책을 읽어왔다. 그런데 그 중 한글로 된 책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고 거의 다 영어로 된 책이다. 아무래도 소프트웨어 분야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어 번역된 책을 읽는 것보다는 영어로 읽는 것이 유리한 점이 많아서겠지만 이제 와서는 한글로 된 책을 보면 용어가 생소해 이해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오덕 선생님의 지적대로 내 정신이 크게 훼손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세계가 하나의 정보망으로 얽혀있는 시대에 우리말의 순수성을 온전히 지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뿌리가 무엇이고 내가 쓰는 말과 글이 어떤 정신을 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오덕 선생님의 책을 통해 배웠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 이런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아마 이오덕 선생님이 아직도 살아계셔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곳곳에 빨간 줄 그으시며 더욱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꿔주셨을 거란 생각에 원고를 읽고 또 읽어보게 된다.

공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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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8)
  컴퓨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박변 2014-12-24 21:41:35
한글 지킴이까지...갸륵 대견...어쭈쭈
추천0 반대0
(138.XXX.XXX.53)
  사실 Kong 2014-12-25 18:26:37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거죠...ㅠ.ㅠ
추천0 반대0
(162.XXX.XXX.19)
  가용이라….. 곽건용 2014-12-22 16:20:09
내가 오늘은 가용인데…. 지난 토요일엔 가용하지 않아서 해끝잔치 못 가서 무지 섭섭… ㅠㅠ
추천0 반대0
(24.XXX.XXX.213)
  그러게요...ㅠ.ㅠ Kong 2014-12-22 16:43:32
이럴 경우 '이월'이 가능하면 좋으련만요...ㅎㅎ
추천0 반대0
(38.XXX.XXX.82)
  한자어의 조어 능력이 오달 2014-12-22 13:59:16
뛰어 난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실생활에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너무 쉽게 만들어요.
옛날 컴퓨터 용어중: 천공기, 독취기. 이따위 단어를 한국어 단어로 보아야 할까요. "가용"이라는 말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글이 쓰인 상황을 모르면 이해하기 쉬운 말은 아니네요. 하여튼 공자의 한국인 후손으로 고민이 많겟습니다.
추천0 반대0
(220.XXX.XXX.222)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Kong 2014-12-22 14:35:40
한자는 뜻글자이다보니 정말 조어 능력은 뛰어난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남용하다보면 말생활과 글생활이 점점 멀어지는 폐단이...
그러고 보면 다양한 언어권에서 들어온 어휘들이 많이 섞여 있는 영어는 비교적 잘 유지/발전되고 있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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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XXX.XXX.82)
  쌤콩님의 유려한 글쓰기 워낭 2014-12-22 08:50:51
오밀조밀 맛있어요.
추천0 반대0
(23.XXX.XXX.229)
  흐흐 Kong 2014-12-22 14:36:49
비록 과찬이신 것은 알겠지만
기자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으니 절로 춤이...ㅋㅋ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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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XXX.XXX.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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