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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민주주의 왕초보?
[이상희의 사람과 세상] 투표 중요성 체험은 어려서부터
2014년 11월 04일 (화) 12:37:20 이상희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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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딸의 가방에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학생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임원을 뽑는 선거 홍보물들이다. 손가락 두 개 합친 정도 크기의 종이에 이름과 출마하는 직함을 손으로 적어 놓은 전단지부터 시작해서 컬러펜으로 일일이 꾸민 배지까지 제법 다양하다. 딸아이에게 물어 보니 출마자는 4~5학년 아이들이고, 선거에는 유치반부터 전교생이 참가한다고 한다.

딸아이는 꿈을 펼친다. 자기도 4학년이 되면 출마하겠단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유치원생이 뭘 알며, 1학년생이 뭘 안다고 어린 아이들에게 이런 선택을 맡길까? 괜히 예쁘다거나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회장단 임원을 뽑으면 어떻게 하라고? 선생님들이 잘 보고 가장 똘망똘망하게 일 잘 할 것 같은 아이들을 시키면 가장 효율적일 텐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정색을 한다. 자기 집단의 대표를 뽑는 일인데 당연히 그 구성원들이 뽑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택이 현명하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몫이고, 현명하지 않은 선택을 하면 치르는 대가를 통해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게 민주주의인가?

   

그러고 보니 나는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자라지 않았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 등 임원은 주로 담임이 임명했다. 그 때의 반장들은 선생님이 예뻐하고, 대부분 후원 능력이 월등한 부모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간혹 직접 투표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선거운동의 기억도, 출마의 변을 들었던 기억도, 친구들과 공약을 비교하면서 누구를 뽑을까 고심했던 기억도 없다.

오히려 정치와 투표에 대한 첫 기억은 어린 시절에 읽었음에도 매우 또렷하게 머릿속에 각인된 신문기사다. 90%를 웃도는 투표율과 90%를 웃도는 찬성률로 재선되어 자신 있는 표정의 사진과 함께 실린 대통령 선거 결과였다. 기사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이제는 안심이구나, 이렇게 훌륭한 분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당선이 되셔야 할 텐데.' 그리고 '아, 투표란 이런 거구나. 단일 후보에게 찬성표를 던지는 것.'

이런 투표에 대해 설명해 주는 어른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투표는 지금 따져 보면 아마 유신헌법과 관련되었거나 그 비슷한 시기 대통령 선거였던 것 같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외삼촌이 유신헌법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다 엄마의 당혹스러운 만류와 제지를 받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나서 내가 직접 투표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투표소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가 봤자 소용없다는,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어서였다. 아, 그렇다. 한 표의 중요성은 투표하라고 사람들을 밀어붙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중함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느끼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는 1학년짜리 아이라 해도 말이다.

11월 4일 투표를 위한 자료와 투표용지가 배달되어 왔다. 두툼한 책자에 빼곡하게 씌어 있는 각종 법안과 출마자들의 변을 이번에는 제대로 읽고 시간 맞춰 투표지를 발송해야겠다. 그런데 좀 큰 글자였으면 더 좋을 텐데. 돋보기안경을 찾아본다. 딸아이처럼 엄마 역시 민주주의 왕초보인 것이다.

이상희 (고고미술사 85, UC 리버사이드 교수)

*LA 중앙일보 칼럼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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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4)
  유신과 군사정권에 대한 기억을 워낭 2014-11-04 23:08:00
아주 또렷하게 새기고 있군요. 우리도 지금은 번듯한 나라가 됐지만 야만의 시대를 벗어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요. 그런 의미에선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초보들이지요. 인류학자의 일상 수필, 맛깔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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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76)
  ㅠㅠ 이상희 2014-11-05 07:51:31
참 신기해요. 초딩 때 일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치룬 2014 중간 선거 결과 때문에 착잡한 아침을 보내고 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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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XXX.XXX.30)
  청출어람이라고... 김종하 2014-11-03 20:23:45
똘똘한 따님, 4학년 반장 따논 당상^^
전 아직 미국 투표권 없지만... 있는 분들은 꼭 투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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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31)
  제리 브라운 재선? 이상희 2014-11-04 17:20:56
이번에 제리 브라운이 주지사로 재출마했다는 것도 몰랐어. 근데 투표건이 너무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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