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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은 차단하고, '편'을 만드는 사회
사회학자 엄기호의 [단속사회]가 주는 메시지
2014년 09월 25일 (목) 22:31:48 이원영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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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권유를 받고 지난 주말 LA한인타운에 있는 미국교회를 찾았다. 설교 시간에 '종교와 과학의 대화'란 토픽이 있어 흥미로울 것 같으니 함께 들어보자는 제의였다. 건물은 지은 지 130년이나 돼 고풍스러웠다. 높은 천장, 묵직한 파이프 오르간 선율이 경건함을 더했다. 중·노년층 백인 신도들이 대다수였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교회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 시간을 마련했다는 게 신기했다.
   
목사가 지질학자와 앉아 창조론과 우주빅뱅을 얘기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 대신 루시 존스라는 지질학자와 단상에 앉아 '창조'와 '우주 빅뱅'을 놓고 대화를 나눴다(사진). 박사가 주로 얘기를 했고, 목사는 "흥미롭다(interesting)"라는 반응을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신도들도 전혀 지루한 표정 없이 이색적인 대화를 즐겼다.

40여 분간의 대화가 끝난 뒤 목사는 "새로운 이야기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고 넓어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전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두 주제가 차분하게 대화하며 교집합을 넓혀가는 모습에서 나는 '성장'을 읽었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단속사회'라는 책에서 "만남의 관점에서 볼 때 성장이란 관계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관계의 확장이란 '남'이 '너'가 되는 과정이다.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될 수 있고, '우리'라는 관계의 끊임없는 확장이 곧 성장이란 설명이다. 엄기호는 스스로 안으로 꽁꽁 묶어두려는 단속(團束)과, 관계를 끊었다 맺었다를 반복하는 단속(斷續)이라는 두가지 뜻을 담아 한국사회를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오프라인에서는 끊임없이 관계를 차단하면서, 온라인에서는 과도하게 '접속'한다. '곁'은 없애면서 '편'은 계속 만들어 나간다. 만남을 통해 남을 너로 만들어 우리라는 공동체를 함께 형성하는 시스템은 고장났다. 그런 한국사회를 '사회가 아닌 사회', '성장이 정지된 사회'라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남의 이야기 듣는 것을 지겨워하게 되었고, 말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모두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한국이나 미주한인사회에 눈을 돌려보면 '단속사회'가 이미 우리 생활과 의식의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함께 어깨동무 하며 나아갈 곁의 사람들은 점점 없어져 외로움은 깊어가고, 그 보상은 온라인의 '과도한 접속'으로 표출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버 세상에서도 남이 너가 되고 우리로 '성장'하는 모습보다는 '편'에 고립되고 '편'을 나누고 확장하는, 성장의 종말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다층·다면적 갈등구조가 왜 '사회 아닌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으며, 그 속의 사람들이 왜 점점 힘들고 외로워지는지 알 것 같다.

그렇다면 '편'을 강요하여 끔찍한 악몽의 사회가 되어버린 현실을 어찌 극복할 것인가. 엄기호는 곁에 있는 이의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말로 들릴 때까지' 끊임없이 묻고 들어줄 때 파괴된 '곁'이 회복될 수 있다고 썼다.

자식과 부모, 아내와 남편, 고용주와 종업원, 국가와 국민, 남한과 북한… 곁에 있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말이 되지 못한 말'을 단숨에 걷어차버림으로써 스스로 '사회 아닌 사회'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종교와 과학이라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남남이 만나 서로에게 '말이 되지 못한 말'을 경청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갈등의 이 시대가 나아가야할 길을 생각해 보았다.(*중앙일보 칼럼 전재)
이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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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3)
  곁은 없애고 편은 만들고 양민 2014-10-03 10:02:10
씁쓸하지만 요즘 사회가 정말 그런 것 같군요.
진정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세상이 그립습니다.
멋진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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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XXX.XXX.145)
  줄어드는 대인관계가 문제입니다. 박찬민 2014-09-26 15:37:48
'곁'은 없애면서 '편'은 계속 만들어 나가는 악순환, 어른거리는 성장의 종말, 지금까지 본 사회 문제 진단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추천0 반대0
(108.XXX.XXX.61)
  댓글 공백 면피 생큐 필자 2014-09-26 19:20:44
아크로 사상 처음으로 무댓글로 남을 뻔했는데 님이 판타스틱하게 달아주시는 바람에 오백개의 댓글로 여기겠습니다. 재미없는 글에 댓글 남겨주심에 미안,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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