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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삽뽀루 한 병 만들 수 있나"
미군 포로 하와이 수용 2700 징용한인 소식지 [자유한인보]
2014년 08월 25일 (월) 15:38:32 이원영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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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이원영 동문이 중앙일보에 발굴 특종으로 보도한 기사 중에서 일부를 전재한 것입니다. 이 동문이 보도한 '자유한인보' 4,5호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독립기념관에서 인증을 해주었습니다. 자유한인보는 1~7호가 발간됐으나 그동안 원본 7호만 발견되고, 3호는 사본, 나머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입니다.)

일제에 징용돼 남양군도 등에서 미군 포로가 됐던 한인 징용자들이 하와이 수용소에서 만든 주간지 '자유한인보' 4,5호 진본이 발견됐다.

자유한인보는 2700여 한인 포로들의 유일한 소식지로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주간지 형태로 7호까지 발간됐다.

   
자유한인보 4,5호의 진본 표지.

이 잡지는 한인 징용자들의 생활상은 물론, 한국 및 세계 정세 등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원본은 7호만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에 확보된 상태였고 2013년 말 3호 사본이 발견된 바 있으나 나머지 존재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3호(1945년 11월 15일), 4호(11월 23일), 5호(12월 2일)의 발간일을 감안할 때 귀국이 확실시되던 1945년 10월 말 첫호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7호(1945년 12월 12일)로 종간됐다.

이번 4,5호와 함께 7호 부록으로 발간된 전체 포로들의 이름과 주소가 담긴 명단도 발견됐다. 이 주소록은 한국 당국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훼손돼 정확한 명단 파악이 어려웠으나 이번 목록엔 2700여 명의 온전한 리스트가 담겨 있다.

이번에 발견된 자유한인보는 '독도 화가'로 잘 알려진 권용섭(56.LA)씨가 부친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확보했다. 부친 권임준씨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20살 때인 1944년 7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오키나와에서 미군에 포로가 됐다.

권 화백에 따르면 부친은 1945년 12월 26일 귀국선을 타면서 자유한인보를 여러 권 가져왔지만 나머지는 유실되고 4,5권만 남았다. 부친은 2000년 타계했다.

자유한인보는 밀랍지에다 철필로 손글씨를 쓴 뒤 이를 등사기 롤러를 이용해 찍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으며 한 호를 대략 300권 정도 찍었다.

A4 크기 갱지에 한글.한문 혼용 세로쓰기며 4호는 68, 5호는 54페이지 분량으로 한쪽 면만 인쇄돼 있다. 구성을 보면 권두언을 시작으로 논단, 국제뉴스, 시(신체시), 역사,수필,연재소설, 퀴즈 등 시사교양 잡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독립기념관 홍선표 책임연구위원은 "이번에 4,5호가 발견됨으로써 1~7호 중 절반의 내용이 확보되는 셈이어서 징용실태와 독립운동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와이에 수용됐던 한인징용 포로들의 모습. 이들은 여기서 미국의 발전된 문물을 간접 체험했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글 넘쳐나> 

   
귀국을 앞두고 분단되는 조국을 걱정하는 글.

 '자유한인보'는 하염없는 하와이 포로 생활을 하다 일본 패전 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시점에서 발간되기 시작했다. 1945년 11, 12월에 걸쳐 1~7호가 발간됐고 12월 26일 귀국선을 탔다. 귀국을 앞둔 2700명의 한인 포로들은 가족을 만날 들뜬 감상에 젖었지만 분열을 일삼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38선으로 갈리는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에 비분강개했다. 자유한인보에는 개인주의를 버리고 단결하여, 조국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주장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4호에 익명으로 기재한 '우리들의 느낌'이란 글을 보자.(해독 가능한 표기 그대로 전재) "환향기에 닥친 동지여,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라!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분산을 합치는 것은 응당한 처사다. (중략) 세계의 정세를 깊이 살피자. 우리들 하나하나의 적은 힘으로 배겨낼 시대가 아니다." 포로들 사이에서도 많은 분열과 갈등이 상존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군의 앞잡이로 동족을 가혹하게 다뤘던 인물들도 있었을 것이고, 친일 행적 정도에 따라 내적 단합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 된다.

수용소 내부 교육보호 시설인 '숭신사(崇新舍)'를 소개하는 글에선 "…입으로는 자유독립 말하면서도 내집, 내마누라 생각뿐이고…아직도 양반예찬설이 한창이며…식당에서 내가 조흔 밥을 먹겠다고 피가 터지고…"라며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도호 필자의 '우리의 힘을 길릅시다'란 글도 비장하다. "민족공영이 즉 개인의 번영임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자족끼리 상살의 피를 씻으며 질투시기하고 호시탐탐 그 약점을 엿보고 잇는 침략자로 하여금 절호의 기회를 취득케하야 결국 동망(同亡)의 운명을 초치하야 금일에 이르게 함은…일가정의 생존과 안락만 취하고자 경쟁하엿지 민족전체와 국가란 것이 내 개인의 흥망과 연관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하고 생각이 천박하엿으며 또한 무시한 소치로다….견인불발의 용기와 의중경명(義重輕命)하는 정신으로 국난을 돌파하고…."철저히 국력을 키워 다시는 비극을 맞지 말자는 결의다.

설악거사란 필명으로 쓴 글은 분단으로 치닫는 조국 현실에 대해 피를 토하듯 개탄한다. "신문 지상으로 보건대 나라를 남북으로 갈라놋고 남에는 미국, 북에는 소련 양개국이 지배 하에 잇다는…현상태의 조국을 어데라고 불러야 옳으며 우리가 갈 곳이 어데라 칭해야 옳으리요…우리가 지금까지 일구동성으로 독립만 원하엿쓰나 시기가 당도하니 파당의 싸움으로 도라가고 귀한 시일만 허송하지 안는가…철망 속에 감금을 당하엿을망정 정신까지 포로는 아니다. 3천이 합심하야 일치한 정신으로 귀환한다면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한뭉치가 되여서 조국의 완전독립, 아니 억수만년의 자유행락의 무대인 금수강산 삼천리를 맨들 껏이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갈 조국을 또다시 미, 소가 분할 점령하고 있으니 그 착잡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유한인보 5호에도 애국적인 글은 곳곳에 스며 있다. 국천현 필자는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자'는 글을 남겼다. "죠국을 도라다보니 근심되는 바 많으며, 지금이 가장 중대한 위기인만큼 모든 파쟁을 깨끗이 청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40년 전 선배들이 조선의 완전강고한 독립국가를 창조하고저…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그 당시의 국정보다 지금의 국정이 더욱 위급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자주권을 위하야 대동단결하야 새조선 건설의 기초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더한층 조국을 사랑함으로 한번 죽어서 건국의 선봉이 되자…하루 바삐 우리 국토를 반환시키어 완전한 자주독립을 반석 우에 건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선배가 조국의 독립을 위하야 성심으로 제창하고 부르던 그 신념의 각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음은 부인치 못할 것이다…." 이글을 보면 징용 포로들 중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그 계보를 잇는 인물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청년들로서 비록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그들을 위해 싸웠으되 마음만은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았던 우국충정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던지는 울림이 크다.

   

조국의 문명이 시급히 발전해야 함을 주장하는 글.

자유한인보 5호에는 '대한사람 대한으로'라는 제목의 편집자 글이 실려 있다. 붓으로 38선을 지워 온전한 한반도를 그리는 그림도 실려 있다. 당시 조국을 되찾은 한인 징용자들의 심경과 각오가 이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의 전문을 당시 표기를 살려 전재한다.

대한사람 대한으로…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표현하는 말인 듯하나, 출처는 여하간에 우리는 노래 삼어서 이 말을 얼마나 불럿든가! 그 정성이 통햇뜬지, 과연 대한은 일본의 손에서 해방이 되엇쓰나, 지금 형편을 보면 대한은 여전히 대한사람의 것이 않이다. 그 원인은 대한사람이 대한을 가질 힘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북위 38도 부근 지도를 실으니 이것은 우리의 고향이 소련이냐, 미국이냐를 알자는 것이 않이다. 이 선을 지우기 위하야 우리의 힘이 얼마나 한가를(있는가를) 반성하자는 것이다. 단결, 노력, 인내, 그리고 교육, 공업, 농업, 우리가 헤일(셀) 수 잇는 모든 문화의 힘이 여기에 집중되는 날, 우리가 이 선을 지우고 진실한 대한사람의 대한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독립이니, 자유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다맛 슬퍼하고 또는 성을 내고 소리를 지른다고 얻어지는 것은 않이다. 물러가서 고요히 우리들 자신의 힘을 도아야 할 것이다. 대한사람은 대한땅에 다리를 멧개나 놧는가. 대한사람은 대한땅에 공장을 멧개나 가졋는가. 대한사람은 대한에서 쓸 석(성)냥 한꼬치를 맨들(수)가 있는가. 말이 자유독립이 않이라, 실력이 자유독립이다. 북위 38도는 무슨 도(道), 무슨 군(郡), 무슨 마을을 뚤고 잇는지, 그것이라도 우선 알어보기로 하자.

   
38선이 그어진 지도를 손을 그렸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편집자글에 실린 삽화. 분단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붓으로 38선을 지우고 있다.

 

<조국의 문명화를 간절히 원함>

숱한 고비를 넘기다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일제징용 한인 포로들. 2700명이 미군 하와이 수용소에서 갇혀 있다가 마침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만가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유한인보'. 고향과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넘쳐났지만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조국이 발전해야 한다는 간절함도 넘친다.

본보에 의해 자유한인보 1~7호 중 4, 5호가 처음 알려졌는데 4호 '세계뉴스' 코너에서는 '우리나라 소식'도 전한다.

'서울의 위생에 대하야'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글이다. "…서울에 수세식 변소가 없는 것은 건강상 큰 위험이며 완전한 수도가 설시(設施)되지 못한 것은 불편한 것이다…위생에 관해서는 한인은 마음 섭섭할만큼 연구나 경험이 없다…." 서울에서 통계 사무를 보던 앤드루 왕이라는 한인 미군대위의 보고서를 번역한 것이다. 하와이 해변 청소 등을 하면서 미국의 문명을 접한 한인들의 눈에는 수세식 변소가 없는 서울의 모습이 낯뜨거웠을 것이다.

'콜롬비아의 도시개선'이라는 논단도 나온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온 실비아 마틴이라는 사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콜롬비아국은 산이 많아서 국민은 깊은 계곡에 갇혀 살고 각부락은 높은 준령으로써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나라에 어떠케해서…20세기의 문화를 다른 나라에 지지않게 보존하게 되엿는가. 이 문화 향상의 비결은 공공향상회(The Soceity for Public Betterment)가 잇는 것이다…전국의 지부를 통해서 19세기부터 열렬한 개혁이 잇었다…이 회원은 국가 장래를 위하여 국민을 지도할 만한 공공정신을 갖인 사람들이다…아무도 사리(私利)를 거둔 사람은 없었다…" 이 글을 소개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박형무 필자는 '자유독립의 기초-기술자의 양성'이란 글에서 우리나라의 낙후된 기술을 한탄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역설한다. "…실상 넓지도 않은 조선내지의 철도 하나를 우리 손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대한사람의 대한이라고 부르짓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고…자연과학의 이론적인 기초연구에 관해서는 여기에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가 '아사히'가 조타(좋다), '키링'이 조타, '삽뽀루'가 조타 하며 마실뿐이엿지 맥주 한병 똑똑히 제조한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서 누구엿뜬가…" 박형무는 이같은 과학기술의 낙후는 일제가 교묘하게 이런 교육을 시키지 않은 탓도 크다고 했다.

글은 이렇게 맺는다. "…귀국일이 목전에 닥친 우리들은 마치 자유독립의 나라에 향락을 찾아가는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잇으나 자유독립의 기초는 즉 기계를 부리고 고치고 물건을 제조하고 하는 우리 자신의 피와 땀의 실력에 잇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리종실 필자는 '교육과 환경'이란 글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미국의 '해랭케라(Helen Keller)'여사는 맹인과 농아를 겸한 사람이었으나 그 일홈(이름)이 세상에 들내게 된 원인은 교육의 힘이라 할 것이다…패스터롯치(페스탈로치)씨는 서서국(스위스)인으로 자기 일생을 아해(아동)들 교육에 헌신한 사람으로…" 이같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꼬집는다. "…서당이나 가정에 잇어 아해들의 의사를 전연 무시하며 부형 또는 선생의 의사만 맹목적으로 주장하며 강요하여 왔다…그러니까 의사불상통으로 아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경우가 많다…" 70년 전의 주장으로 보기에 놀라울 정도로 진취적이며 지성적이다. 지금 내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원영(정치 81, 중앙일보 논설위원)

(*자유한인보 관련 내용은 koreadaily.com에서 검색하면 5회에 걸친 시리즈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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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4)
  70 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한국과 미국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던 그때 미주 한인들이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변변 2014-08-26 10:43:03
[서당이나 가정에 잇어 아해들의 의사를 전연 무시하며 부형 또는 선생의 의사만 맹목적으로 주장하며 강요하여 왔다…그러니까 의사불상통으로 아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경우가 많다] 저는 이 대목을 보고 그때 사람들이 앞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의 의사를 무시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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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245)
  요즈음 이원영기자 양민 2014-08-26 08:33:35
글빨도 좋고, 특종도 내고,
이전보다도 더욱 멋진
언론인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축하합니다.
추천0 반대0
(108.XXX.XXX.145)
  특종 축하합니다. 오달 2014-08-26 08:21:47
당시의 아크로폴리스 타임스네요.
우리도 잘 보관합시다.
추천1 반대0
(108.XXX.XXX.241)
  발굴대특종... 이종호 2014-08-25 09:22:46
해방 전후 해외 한인사를 새로 쓰게 만든 획기적 발굴 특종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고 독립기념관에서도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추천1 반대0
(74.XXX.XXX.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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