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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고 피지도 않은 채 갈 수는 없지”
[오달 에세이] 산사(山寺)의 겨울 장미
2013년 12월 27일 (금) 17:48:48 김지영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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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절집 추녀 밑에 장미 한 송이. 춥다고 피지도 않은 채 갈 수는 없지. 앙다문 꽃봉오리, 그 붉은 색이 처연하다. 까맣게 마른 가시 대궁 속에 아릿한 생명이 조는 듯 깨어있는 듯, 숨 줄을 잡고 있을 터. 계절을 아파하는 사내 나그네의 시린 가슴과 궁합이 맞을 듯. 

나이 지긋한 비구니 스님이 묻는다. “암것두 없는디 거기서 뭘 찍어유?” 대답 대신 사내가 사진기를 보여준다. 명함만한 액정 화면에 그림이 나타난다. 스님의 눈에는 꽃보다 자신의 허연 머리 뿌리가 크게 보인다. “더 이상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나오지 않네.” 잠시 장미 사진의 붉은 꽃잎이 그녀의 메마른 입술과 겹쳐 보인다.

사내는 김일엽 스님의 이야기를 읽다가 휑하고 여기까지 온 길이다.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 여승들만 공부하는 곳이다. 남향으로 큰 절 집이 세 개. 가운데는 이층에는 법당, 일층에는 비구니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인 듯. 양쪽으로는 스님들의 공부방.

그 겨울 장미는 가운데 절 집 동쪽 끝 화단에 있다. 등걸 만 남은 장미 나무 두어 그루, 그 사이에 유령처럼 서있다. 거길 스쳐간 그 많은 비구니들의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똘똘 말아 마른 나뭇가지에 걸어 놓은 듯, 꽃봉오리조차 묵언 의지가 결연해 보인다.

   

일엽 스님, 그녀는 1928년 서른세 살의 나이로 출가한다. 당시 수덕사의 큰 스님 만공 스님이 그녀를 받아주며, 삼십년 동안 글도 쓰지 말라는 충고를 한다고. 이미 시인이며 여성운동가로 이름이 나있던 일엽에게 그동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걸 다 버리라는 말씀이었겠지.

일엽 스님은 만공 스님의 말씀을 따라 1960대 초까지 절필을 한다. 그리고 비로소 낸 책이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제목의 자서전. 자신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사랑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이제 당신과 인연이 다 했습니다”라는 편지 하나 놓고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단다. 그래서 일엽도 속가의 인연 다 버리고 수덕사 견성암으로 갔다고. 경허스님, 만공스님의 법맥을 있는 선승이 되었지만 속가의 마지막 사랑의 기억은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혀 있었던 듯.

일엽과 동갑내기 신여성 나혜석. 첫 사랑이 요절하자 돈 많은 두 번째 남자와 결혼한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첫 사랑의 묘지로 갔다던가. 마지막 사랑은 친일 종교인. 나혜석에게는 친일이 문제가 아니라 배신이 문제였다. 그 남자가 떠나자 그녀도 수덕사 만공 스님을 찾아간다. 그러나 만공 스님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일엽은 문필가로, 혜석은 화가로, 시대를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 일엽은 “신 정조론”을 이야기했고, 혜석은 “정조 취미론”을 썼다네. 두 사람 모두 마지막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자 속세를 떠나고자 한다. 남자가 하나일 필요는 없지만, 꼭 있어야만 하는 한 남자의 부재는 속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 실종으로 받아들였겠지.

덕숭총림 수덕사는 아직도 여일하게 서있다. 거기 일엽의 자취는 없다. 절 안의 조그만 기념품점에는 경허 스님, 만공 스님에 관한 책은 있지만, 일엽 스님 책은 없고. 더구나 그 절에서 받아주지도 않은 혜석의 이야기는 바람결에도 없네.

사내는 일주문을 나오면서 생각한다. “왜 만공 스님은 일엽은 받아주고, 혜석은 거부했을까?”

일엽에게는 일본인 남자 사이에 낳은 아들이 있다.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왔을 때 일엽은 받아주지 않는다. 마침 혜석이 수덕사 아래 수덕 여관에 있을 때라고. 혜석은 일엽의 아이를 양자로 삼아 보살핀단다.

자신의 아들을 물리치는 차가운 의지, 남의 아이도 받아주는 따스한 인정. 만공 스님은 일엽의 얼음 같은 단호한 마음을 미리 보신 것인가? 금강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에 이르는 길에는 그런 근기가 필요한 것이겠지.

“나는 언젠가 한번이라도 무슨 일인가에 그런 근기가 있었던가?” 사내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일엽 스님은 제자들의 시봉을 받으며 75세에 천수를 다한다. 혜석은 52세에 행려병자로 객사를 한다고. 마음이 따스한 것도 이생에서는 혹독한 업보인가? 일엽의 친아들이자 혜석의 양아들은 먼 후일 절에서 그림을 그리는 스님이 되었다.

피지도 못하고 질수도 없는 겨울 장미 한 송이, 그 꽃술에 겹겹이 싸인 이야기 끝이 없다.

오달 김지영 (사대 69, 변호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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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3)
  그분의 아들 회화나무 2014-01-02 21:23:19
일당 스님이 쓴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http://www.amazon.com/The-Lost-Mother-Joon-Kim/dp/0595697240/ref=sr_1_2?ie=UTF8&qid=1388726148&sr=8-2&keywords=JOON+JA+KIM
추천1 반대0
(68.XXX.XXX.143)
  나혜석의 정조론은 워낭 2013-12-31 16:36:06
나혜석이 일제시대에 주창했던 신정조론은 지금 생각해도 가히 혁명적인 내용이었지요. 남자들은 자기 여자들의 정조는 요구하면서 다른 여자의 정조를 훔칠 생각을 한다고...자유연애를 추창하고...이혼후 왕성한 사회활동...그런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은 왜 그리 일찍 죽지요? 오십 초반에...
추천2 반대0
(74.XXX.XXX.3)
  색즉시공 공즉시색 허갱년 2013-12-27 12:38:00
왜 그럴까? 오달님의 "산사'에서도 이 상념이 맴도는 것은,
추천1 반대0
(66.XXX.XXX.49)
  受想行識 亦復如是 오달 2013-12-29 05:35:32
색즉시공 공증시색 다음에 오는 구절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람은 오온 - 색 수상생식 - 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색은 물질,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과 현상.
잊지 말아야 할것은 "수상행식도 역시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추천0 반대0
(97.XXX.XXX.0)
  글자도 생명이 있어 오달 2013-12-29 05:40:18
지워지길 거부하네요.
추천0 반대0
(97.XXX.XXX.0)
  受想行識 亦復如是 오달 2013-12-29 05:35:28
색즉시공 공증시색 다음에 오는 구절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람은 오온 - 색 수상생식 - 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색은 물질,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과 현상.
잊지 말아야 할것은 "수상행식도 역시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추천0 반대0
(97.XXX.XXX.0)
  受想行識 亦復如是 오달 2013-12-29 05:35:32
색즉시공 공증시색 다음에 오는 구절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람은 오온 - 색 수상생식 - 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색은 물질, 수상행식은 정신 작용과 현상.
잊지 말아야 할것은 "수상행식도 역시 그러하다"라는 말입니다.
추천0 반대0
(97.XXX.XXX.0)
  오늘의 법문 엉겅퀴 2013-12-27 10:38:27
"춥다고 피지도 않은 채 갈 수는 없지."
"금강 벼락"
"피지도 못하고 질수도 없는 겨울 장미 한 송이"
추천0 반대0
(216.XXX.XXX.228)
  법문이란 오달 2013-12-29 05:36:45
알쏭 달쏭의 다른 말이죠.
추천0 반대0
(97.XXX.XXX.0)
  감히 일엽은 혜석을 깔보지 못한다! 심흥근 2013-12-27 05:11:58
여기 오달선사님 수필의 화두 --->> [나는 누구일까?] 見性...모든 망혹(妄惑)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천성을 깨달음.[일엽=혜석?] 도찐 개찐일까?? 아니지 구별을 좀 해보자.일엽은 절간 경내에서 천수를 다했고 < vs.> 혜석은 객사했다는 사실. 사람은 임종시 어떤모습으로 마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다르게 평가 된다.영웅은 대게 밖에서 죽는다.유관순 누나 쟌다르크, 밖에서 죽음을 맞는것은 시적이며 더욱 우주합일적이다
추천1 반대0
(76.XXX.XXX.234)
  혜석을 오달 2013-12-29 05:38:25
더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어느 동네고 이기는 자들은 모진 근기가 있죠.
그런 근기는 없어도 따스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패자가 되고...
추천1 반대0
(97.XXX.XXX.0)
  비구니와 겨울 장미 김종하 2013-12-27 00:56:15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이 조합이 오달님 손을 거치니 이렇게 잘 통할수가...
오통달^^이네요. 감사~
추천0 반대0
(107.XXX.XXX.123)
  비구니 기거처 오달 2013-12-29 05:39:11
앞뜰에 있는 장미, 대단한 인연이지요.
추천0 반대0
(97.XXX.XX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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