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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나그네 길이라도 좋아라
[아크로 ‘크리스마스’ 특집] 상실의 고국 여행기
2013년 12월 24일 (화) 15:19:39 이상실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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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눈감으면 선하고 가보면 낯선 그곳. 삼년 반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고향 길은 이제 나그네 길이다. 나그네, 원래는 나간 사람이란 뜻이라고. 이제 고향은 돌아가는 곳이라기보다는 나가서 보는 곳이 되고 말았다. 많이 보고, 골라 먹고, 조금만 생각하고… 그런 나그네 여행, 시간은 참 잘 간다.

[볼거리]

이번 여행의 제일경은 낙동강 강둑길이다. 

경상북도 안동 하회 마을. 눈이 내린다. 소백산인지 태백산 자락인지, 동해안에서 안동 내륙으로 들어오는 산길. 희끗 희끗 눈발이 보이더니, 풀풀 그리고 펄펄, 눈이 내린다. 하회마을에 들어 설 때는 함박눈이 된다. 소록소록, 눈 오는 소리.

세계 문화 유산 등재, 하회탈, 별신굿, 유성룡 후손들의 종가 등등, 자랑거리가 넘치는 곳이다. 그런 거창한 문패도 좋지만, 잠시 떠도는 길손에게는 지금, 여기서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다. 눈밭 그리고 잘 생긴 소나무, 오른쪽으로는 나룻배 하나 보이는 낙동강, 왼쪽으로는 지붕이 단정한 예쁜 초가집, 그리고 그 너머 약간은 건방진 기와집 추녀 끝. 그림이다. 나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잠시 머물다 간다.

   
하회마을을 휘감는 낙동강 둑에 눈이 쌓인다. 내 그리움도 쌓인다.

경주 대릉원의 늦단풍

늦가을을 기대하고 온 길인데 한국은 초겨울이다. 마른 단풍 사이 겨울바람이 스산하다. 그런데 여기는 예외다. 옛 임금들의 힘이 아직도 남아 잠시 가는 계절을 붙잡아 둔 듯 단풍이 남아 있다. 미추왕능, 천마총 그리고 이름 없는 왕릉 몇 개, 대릉원 – 큰 묘지공원이다. 작은 동산만한 무덤들 사이에 단풍길, 소슬하게 아름답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 절정을 조금 넘긴 단풍.

참 붉다. 참 노랗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이런 정경을 다시 보리오.

   
누가 이렇게 멋들어지게 색색의 단풍을 섞어 놓았을까. 바람이? 천마도를 그린 옛 화가의 혼령이?

월정사 전나무 숲도 그 차가운 아름다움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풍경이다.

오대산 월정사. 춥다. 따스한 법문이나 들어 볼까 기대하고 온 오후의 절집은 고요하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약 1.5킬로 전나무길이다. 눈이 살짝 덮인 황토길. 바람이 휭하다. 얼음이 된 전나무 향기가 가슴 깊숙이 내려앉는다. 봄날 이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상원사로 올라가려다 길이 미끄러워 포기한다. 살아가는 데는 포기도 지혜. 안될 일을 붙잡고 씨름해보아야 제자리에서 힘만 빠지지 않던가. 상원사 뒤 오대산 자락 어디에 있다는 적멸보궁은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보겠지.

   
하늘로 하늘로 뻗은 월정사의 전나무.

자갈치는 갈치가 아니라네

부산 자갈치 시장 = 생선 많은 데. 항상 이렇게 알고 있었다. 근데 자갈치라는 말은 아주 옛날 자갈밭이 있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먹거리가 정말 많다. 그리고 손님을 끌기 위한 호객 아줌마들 극성도 볼거리. 꼼장어는 불판에서 꿈틀거린다. 보기보다 그리 맛은 없었다.

깡통시장을 물어서 찾아간다. 국제시장 골목, 세계 먹거리는 다 와있다. 재미있는 것은 현지인들이 그 자리에서 음식을 만들어 판다. 케밥을 파는 중동인, 딤섬을 파는 중국인, 오꼬노미야끼를 파는 일본인 등등. 그래도 최고의 맛집은 떡볶이 달인이 만든 고추장 떡볶이와 부산 오뎅.

광안리 해수욕장은 요새 까페촌이 되었구나. 부산 갈매기, 미쿡 갈매기보다 작지만 더 야물차 보인다. 해운대는 완전히 국제 도시. 동백섬 길을 걷는다. 동백섬, 근데 섬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 섬이었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야트막한 동백섬 꼭대기에는 최치원 동상이, 언덕 밑 바닷가 바위에는 허황옥 동상이. 음양의 조화를 말하자는 건가?

   
용두공원 전망대에서 바라 본 부산 전경. 바닷가 쪽 갈매기 날개모양의 지붕이 자갈치 시장.

   
동백섬 등대.

강릉 선교장

1700년경부터 전주 이씨 지방 호족이 살고 있던 고택. 아직도 그 종손이 산단다. 소나무 동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널찍한 집터, 기와집 몇 채가 살포시 앉아있다. 작은 연못, 정자, 행랑채, 그리고 종가집. 그 중 일부는 한옥 체험 숙박 시설로 쓴다.

차가운 바람이 바람처럼 지나가는 나그네를 맞는다. 겨울바람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은 커피 한잔. 기와집 축에 못 끼고 뻘줌한 가건물 같은 커피집이 나그네에게는 더 고향 같다.

   
한 둥지에 들어앉은 커피집과 고택 선교장.

서울 도성과 북악 스카이웨이

서울 첫 아침을 성곽길 트렉킹으로 시작한다. 북악 스카이웨이 주차장에 차를 받쳐놓고 성균관대 뒤편 와룡공원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 말바위 근처에서는 서울 도성 성곽길을 걷는다. 서울에서 살 때는 관심도 없었던 길인데 관광객으로 오니 이런 길도 보인다.

   
서울에서 맞는 해돋이, 이것도 구경거리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백화차, 군고구마, 그리고 족욕

산촌에 눈이 쌓인 날, 우연히 들른 꽃동네 찻집. 자신이 사는 전원주택을 꽃 찻집으로 개방한 주인아줌마 인심 한 번 푸근하다. 육천원짜리 백화차 한 잔에 속이 노란 호박 고구마가 덤으로 나온다. 차 맛보다 군고구마 맛이 고향의 맛이다. 거기다 족욕까지. 창밖으로 벤치하나, 바깥세상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찻집안의 온기 때문인가?

   
꽃찻집 네모진 창문 너머로 저물어가는 가을.

[먹거리]

이번 여행길의 최고 맛은 대관령 한우.

월정사에서 묵던 날, 호텔 종업원의 말만 믿고 대관령 한우집을 찾아간다. 눈발 날리고 길은 얼어붙고, 차는 미끄러지고. 그래도 먹는 것이 우선. 갈 데까지 가보자. 옛 대관령 길 초입까지 대관령 한우 정육 식당을 찾아 간다. 최상급 한우 ++ 급 안심과 등심, 그리고 채끝 살. 그 자리에서 구어 먹는다. 와인으로 화룡점정. 사십 평생 먹어본 소고기 중 단연 최고.

덤으로 배운 소고기 부위. 아롱사태가 거기인 줄은 첨 알았다.

안동 헛제사밥, 이번 여행의 최고의 허당이다.

안동 양반들 제사상 한번 요란하게 차린다고. 그래서 제사밥을 상품화 한 것이라는 데. 이건 정말 허풍이다. 전 몇 개, 적 한 두개, 그리고 탕. 맛도 없고 볼품도 없다. 앞으로 그 동네 가시는 분들 절대 시키지 마시길. 차라리 안동 간 고등어를 먹을 것을…

   
안동 헛제사밥. 안동소주는 상품명대로 일품

주문진 도루묵, 그 톡톡 씹히는 통통 알

얼큰한 찌게도 좋고 알밴 구이도 맛있다. 옛날 어느 임금이 피난길에 먹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은어”라는 이름을 내렸다나. 근데 나중에 궁궐에서 다시 먹고, 뭐 이런 생선이 하고 물리쳤다는 이야기. 그래서 말짱 “도루묵”으로 돌아갔다는 기구한 생선. 내가 먹을 때는 “은어” 맛.

   
알이 배밖으로 나온? 도루묵 구이.

백암온천의 구찌뽕 토종 닭 백숙

구찌뽕이 아직도 뭔지는 모르지만 맛있었다. 인삼 대신 황기를 넣고 그 날 잡은 토종닭을 끓인 거라고 자랑하는 아줌마. 다음 생에서 혹시 닭으로 태어나지 않을까 잠시 걱정해본다.  두 시간 전에 백숙을 시켜놓고 백암 온천 뜨거운 물에 몸을 정갈하게 한 후에 거룩하게 닭다리를 뜯는다. 먹기 위한 정성, 이 또한 나그네의 기쁨.

   
토종닭다리 들고 마냥 행복한 필자

[생각거리]

생각은 조금만 하자는 게 나의 여행 철학중의 하나다. 고국의 나그네 길에는 스쳐간 생각 몇 가지.

하나, 왜 빨간 불에도 자동차는 달리는 걸까? 한가한 네거리에서 빨간 정지 신호를 받고 서 있는 차는 내가 운전하는 차 하나일 때 참 당황스럽다. 다른 차들은 신호를 그냥 참고 사항으로 생각하는 듯. 옆에 오는 차가 없으면 너무나 당연 한 듯 신호 무시하고 그냥 가버린다.

둘, 젊은 종업원들의 엉터리 존칭어법, 귀에 거슬린다. “요건 삼천원이시고요, 거기다 조걸 더하면 만원이세요.” “마실 물은 저 쪽에  있으시고요.”  “영도다리는 이 길로 쭉 가면 나오시고요.” 존칭을 받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다. 아마 자신이 없어서 모두 존칭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지.

하나 더, 나그네 길이지만 반가워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국 여행길과는 다르다. 그 사이 커버린 조카들, 주름이 두 배로 는 엄마 얼굴, 마주 대하고만 있어도 좋은 피붙이 형제자매들. 고향길 나그네길 행복하다.

   
아크로 독자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이상실 (간호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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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8)
  존칭어법... 김삿갓 2014-01-02 18:26:38
예전 한국 TV 생방 토론에 출연했다가 '저희 나라가~'라는 말을 써서 무지하게 욕먹었던 아픈 기억이 ^^ 일단 상대는 높이고 자기는 낮추는 것이 미덕이라는 강박관념에....ㅎㅎ
추천0 반대0
(38.XXX.XXX.58)
  모나리자 서갱년 2013-12-27 12:32:08
꿈과 지금이 만나는 것 같네요. 멋있고 그리고 참 예쁘다.
추천0 반대0
(66.XXX.XXX.49)
  여행기가 아니라 수상록 워낭 2013-12-25 21:37:40
상실님은 문학쪽으로 갔어야 했다는 느낌이 물씬.
소녀적 감성과 경륜의 깊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수상록입니다.
사진도 어찌 그리 잘 찍으시는지.생각거리를 보니 진짜 생각 안 하고
여행한 흔적이 물씬. 그게 고수의 여행 전략.
추천1 반대0
(66.XXX.XXX.246)
  사진도 글도 마음도 예뻐라~~ 정연진 2013-12-25 19:14:29
'소슬하게 아름답다' 말도 참 예쁩니다^^
추천0 반대0
(66.XXX.XXX.246)
  글이면 글, 사진이면 사진 Shin 2013-12-25 12:03:34
인물이면 인물~
나도 대신 갔다 온 걸로 할께요.
추천0 반대0
(50.XXX.XXX.224)
  크아아~ 정말 멋진 여행을 하셨네요... 무지 부럽습니다~ 이권병 2013-12-24 23:26:20
ㅋㅋ... 근디, 사진은 혼자만 나오셨네요. 사진 찍어준 사람은 누구일까 무지 궁금합니당~ ^__^
추천0 반대0
(173.XXX.XXX.139)
  와우 양민 2013-12-24 14:43:03
멋진 여행기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요.
추천0 반대0
(75.XXX.XXX.6)
  첫번째 사진 Kong 2013-12-24 12:56:50
정말 기가 막힙니다. 전체적으로 흑백인데 파란 우산과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노란것만 색체를 표현하고 있네요. 저 현장에 실제로 있었던 분은 어떤 기분일까요?
추천0 반대0
(99.XXX.XXX.185)
  파란색 우산 김문엽 2013-12-29 20:43:45
첫번째 사진의 파란색 우산 정말 기가 막히다는데 공감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멀리서 걸어 오는 사람도 파란색 우산을 쓰고 있네요. 다른 사진과 글 전부 정말 훌륭합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22)
  글과 사진이 어우러져... 이종호 2013-12-24 10:30:58
또 한 편 멋진 여행일기가 되었네요. '살아가는 데는 포기도 지혜. 안될 일을 붙잡고 씨름해보아야 제자리에서 힘만 빠지지 않던가' 이런 일깨움의 말씀도 고맙고요. 내 고향 부산의 달라진 풍경을 전해주신 것도 감사, 또 감사. '영도다리는 이 길로 쭉 가면 나오시고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요즘 한국의 풍경은 참, 많이 낯설군요.
추천0 반대0
(74.XXX.XXX.3)
  단풍보살 엉겅퀴 2013-12-24 09:46:39
낮은 곳에 빼곡하게 임한 단풍보살님들,
손가락을 활짝 펴서 합장하셨군요.
아름다운 자연, 착한 백성들, 우리 땅 우리 하늘,
오염되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영원하기를 기원해봅니다.
글과 사진, 모두 훌륭합니다.
추천1 반대0
(216.XXX.XXX.228)
  나그네, 박찬민 2013-12-24 09:25:10
길손, 그 느낌이 이제 정말 와닿습니다.
추천0 반대0
(162.XXX.XXX.114)
  안동 헛제삿밥 이병철 2013-12-24 06:28:14
글, 사진 다 깔끔하게 잘 단장했네. 좋은 추억 쌓았겠다. 특히 안동 헛제삿밥은 언젠가 한번 경험해보고 싶네요. 잘 있지?
추천0 반대0
(139.XXX.XXX.150)
  wow. 오달 2013-12-24 06:21:18
술이 다깨내.
멋진 여행, 더 멋진 사람
추천0 반대0
(108.XXX.XXX.241)
  어제 저녁 오달 2013-12-24 06:28:25
영어 영화 반 종강 음주 가무회 뒤 끝
추천0 반대0
(108.XXX.XXX.241)
  pithy, poignant 오달 2013-12-24 14:22:13
and absorbing.
추천0 반대0
(108.XXX.XXX.241)
  늦단풍 사진 홍선례 2013-12-24 00:57:43
다른 사진들도 좋지만, 늦단풍 사진은 파크뷰갤러리에 걸어 놓으면 당장 팔리겠어요. ㅋㅋ
유명 화가의 그림 처럼 화사한 색채가 가을의 향을 물씬 풍기는 사진입니다.
추천0 반대0
(172.XXX.XXX.49)
  눈과 맘이 호사 김종하 2013-12-23 22:43:24
상실님 여행길 따라가다 보면... 정말 그림 속 주인공이 따로 없네요.
말짱 도루묵 사진에 군침이 절로. 자갈치 즉석 생선들도 아련한데.
크리스마스 특집 멋지고 맛깔란 여행기 감사. 근데 필자의 사진 실력은 원래 알지만, 필자를 사진 속에 담아주는 미스터리 찍사는 올해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해를 넘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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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XXX.XXX.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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