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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도 ‘혁명’을 보았다!
[변변의 혁명에 관한 소고] 제4부-혁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2013년 09월 05일 (목) 16:18:44 변우진 기자 acroedit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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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혁명가의 예를 들면서 [서재필]을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비록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가슴에 불타고 있던 [조국애]는 평생을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혁명에 실패한 사람으로만 써놓고 이 글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혁명에 실패한 후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 나름대로 조사를 좀 해보았고, 이번에는, 그동안 찾아본 서재필의 [혁명 실패 이후의 삶]을 좀 조명해볼까 한다.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가면 [서재필 재단](The Philip Jaisohn Memorial Foundation)이 있다. 이 재단의 웹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이 재단이 지난 몇 년간 서재필의 정신과 사상을 그의 두 개의 조국(한국과 미국)에서 펼쳐보려는 가상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흔적이 보인다. 아래의 글은 이 웹사이트에서 퍼온 것을 참조하고 필자가 찾은 자료들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필자는 본 글의 제1부에서 서재필을 [실패한 혁명가]로 불렀다. 그런데, 그가 [혁명]을 실패한 후에 크게 반성을 하고 나머지 생을 끝까지 자신의 초지를 일관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릴 의무를 느낀 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서재필(1864~1951)은 구한말 격동기에서 해방 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에 역사의 증인으로 살았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침탈에 맞서 일본을 통한 개화의식을 배양해 [갑신혁명]을 시도하였지만 이는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미국으로 망명한 후 '독립신문' '독립협회'를 통한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 결성 및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보여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등은 그가 일생동안 품어왔던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희생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 하겠고 그의 [혁명정신]은 3일 천하 이후, 다소 온건해지기는 했지만 결코 끝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개척자의 삶을 살았다. 독립운동으로 인해 사업이 피폐된 이후 (한때 사업을 해서 거금을 벌었으나 그 돈을 모두 독립운동에 고스란히 바치고 chapter 7 뱅크럽시를 신청한 적도 있다), 30세에 이미 마친 의대를 62세의 나이에 다시 도전해서 (두 번째는 세균학을 전공했다) 의사와 연구의 길을 걷는 만년의 삶 등은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의지의 한국인의 삶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필자는 그의 일생을 연구하면서 여러 번 숙연해기도 했다. 서재필 자신도 다음과 같이 젊은 날을 회상하고 있다:
 
"젊은 시절 훌륭한 뜻을 갖고 있었으나, 모든 일을 너무나 성급히 서둘러서 본래의 훌륭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갑신정변에서) 비참한 실패를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나는 고귀한 목적을 저버리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함에 있어서 매일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서재필은 1882년 23명의 과거 합격자 중 최연소인 18세의 나이로 급제하였다. 지금도 한국에서 고시를 18세에 붙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튼 18세에 과거 급제를 할 정도이니 서재필은 분명 천재였다. 그 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이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과거 급제한 이듬해인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토야마(戶山) 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에 7월까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불과 6개월 만에 통역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일본어가 유창해졌다고 하니 또 한번 그의 천재성이 보인다. 일본 유학을 통해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을 앞세운 수구파의 무력 공격으로 3일 만에 혁명의 불은 진화되었고 서재필은 일본으로 황급히 도피했다. 혁명의 실패로 서재필은 역적으로 낙인 찍혔고 그의 부모와 처, 형, 두 살 된 어린 아들, 동생 등이 모두 연좌제의 희생물로 사형 당하거나 자결하였다.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그가 21세 되던 해인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이후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전개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이 때 가지게 된 그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재필은 교회에서 탄광 사업가이자 교육가인 홀렌백이라는 사람의 지원을 얻어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그는 미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서 중국, 일본의 의학 관련 책을 번역하는 사서 일을 하다가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9년 컬럼비아대학 (지금의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전신)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에 과정을 마쳐 약관 28세의 나이에 한국인 최초의 미국 의사 (M.D.)가 되었다. 18세에 한국의 과거에 급제하고 불과 10년 안에, 마치 번개 불에 콩 구워먹듯, 일본 유학, 혁명, 망명, 미국 의과대학 졸업 등등을 거쳤으니 그의 삶은 참으로 [혁명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부인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 대통령의 조카였던 그녀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Korea라는 나라에서 온 전직 [혁명가]의 울분과 고뇌를 십분 이해하고는 서재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다. 미국 육군 대령과 초대 철도우편국장을 지낸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인사였던 탓에 주위에서 뮤리엘과 결혼하겠다는 남자들은 줄을 섰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아시아 변방 Korea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뮤리엘의 집안에서는 반대가 빗발쳤으나 일단 결혼을 결심한 뮤리엘의 마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대통령 가의 결혼식이어서인지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류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 (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1894년 6월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주미 조선공사관 직원 관사에 방을 겨우 빌려 차렸다. 필자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통령 집안과 혼인을 한 한국인으로는 서재필이 최초이자 최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호화 결혼식에 가족이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고 난민(refugee) 신분으로 신랑 혼자서 결혼식을 치러낸 것도, 필자가 보기에는, 서재필에게는 [혁명가]다운 면모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했던가. 1894년 수립된 갑오정권은 서재필에게 씌워졌던 역적의 죄명을 벗게 해 주었고 공식적인 사면, 복귀가 이루어졌고, 정부는 서재필에게 귀국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서재필은 자신이 [혁명]에 실패했던 곳에, 이번에는 선진사상을 심어 정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고자 마침내 1895년 12월, 부인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외무부 차관 자리가 주어졌지만 이를 마다하고 공식적으로는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를 자처하면서 한때 그가 꿈꾸었던 [혁명] 사업, 즉 민중 계몽사업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정계와 관계의 인사들과 외국 사절들, 여타의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면서 자신의 활동 기반을 다지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공개강연회도 개최하였다. 그리고 배재학당에 나가 세계 정세를 가르치고 협성회를 조직해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토록문화를 지도하며 선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해 한국의 정치,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았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였고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자주자강의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그후 배재학당은 서재필의 영향으로 [토론]이 아주 강한 학교로 자리매김했다고 들었는데, 이 대목에서 필자는 요새 이런 노력을 아주 범 전국적으로 하고 있는 이경훈 동문이 서재필에 필적하는 운동을 이 시대에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필의 주창으로 빛을 보게된, 한글과 영문으로 출간된 독립신문.

이미 미국인이 되어 있던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도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절도 하지 않고, 항상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는데,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그가 현장을 떠날 때마다 대신들은 그를 쫓아내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경악했다고 한다. [혁명가]의 삶은 이렇게 어디를 가나 말썽이 많은 모양이다.

그는 곧 조정 안팎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서재필의 개혁, 계몽운동은 점차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쪽으로 가게 되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대한제국이 흔들리는 배후의 핵심 인물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추방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수구세력에 의해서 서재필은 결국 1898년 5월 14일 조국을 다시 떠나게 되었다.

대한제국 정부에 크게 실망한 서재필은 미국에 건너간 이후 3.1 운동 전까지는 개인 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사업을 운영,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이승만, 윤병구, 여운홍, 안창호 등 국내외의 애국지사들과 계속적으로 교류하면서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독립운동의 일선에 뛰어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용히 사업에 성공하여 풍족하게 살 수 있었던 서재필이 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했을까? 필자의 분석은 이렇다. 서재필은 약관 20세에 일으킨 혁명의 실패에 뼈저린 반성을 한 결과, 우선 자본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는 세상의 경륜을 쌓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방향을 정한 후, 나이 40이 넘어 철이 좀 들면서부터 비로소 [혁명이란 무엇인가] 감을 좀 잡고 세상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운이 국제정세를 지배하자, 서재필은 1918년 12월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영문 잡지의 발간을 제의했다. 영문 잡지를 통해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지배를 알리는 노력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재정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3.1 운동 직후부터 1922년까지 서재필은 4년여 동안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여 3.1 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이상을 만방에 알렸다. 그는 새로 설립한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통해 Korea Review 를 비롯한 다양한 선전용 책자를 발간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서재필은 직접 미국 각 지역을 돌면서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강연 활동을 전개하며 친한 여론을 형성시켰다. 또 미국인이 중심이 된 [한국친우회]를 미국 전역 21곳에 결성하여 미국 의회와 언론, 그리고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동정하며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한국친우회는 영국과 프랑스에도 각각 설립되어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 여론화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서재필은 이 한인자유대회가 미국판 3.1 운동이 되어 미국과 열강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움직임의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했다.

비록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서재필에게는 사업 마인드는 상당히 있었던 모양이다. 문방구점도 성공한 예가 있고, 또 1925년 4월부터 [유일한]과 동업하여 잠시 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 후 유일한은 한국으로 돌아가서 [유한양행]으로 크게 성공한다.
 
혁명에서 거리가 한참 멀어진 환갑을 넘은 서재필은 1926년 9월 펜실베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해 20년 이상 떠나 있던 의사의 길로 복귀하였다. 의학(이번에는 세균학을 전공하였다)을 연구하며 의사로서 분주하게 지내는 동안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한민보 등에 수많은 글을 기고해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노력도 필자 생각에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미련이랄까 반성이 깊이 서재필의 뇌리에 각인된 결과]가 아닌가 보고 있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이 김규식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재필을 미군정청 수석고문으로 초빙하자 서재필은 1947년 7월 1일 83세의 나이로 고국을 방문했다. 조국을 떠난 지 49년 만의 환국이었다. 그는 1948년 9월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라디오 방송과 강연, 각종 면담과 저술 등을 통해 통일된 근대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해방 정국을 정돈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이런 중에 그를 따르는 주요 인사들이 서재필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고, 또 미국시민으로 남아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답변하여 이들의 추대 운동에 반대했다.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자신의 역할의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8년 9월 11일 한국을 떠났다.

서재필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당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국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국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나의 평생의 소원이다.”

[혁명가] 서재필은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곡절 많았던 풍운의 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한국근대사에 개화. 혁신의 선봉장이자 민중계몽의 선각자, 근대민족의 지도자로서 불멸의 족적을 남긴 서재필은 약관 20세에 충분히 준비하지 못하여 실패한 [혁명]으로 말미암아 친인척과 조국에 큰 빚을 졌으나, 나머지 60년에 걸쳐서 나름대로 노력하여 이 빚을 갚았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1994년부터 변호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1996년 혹은 1997년으로 기억하는데, 로스엔젤레스에서 [세계한인변호사대회]라는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서동성]이라는 변호사를 만났다. 아주 인상이 좋고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분이라 금방 친해졌는데 아주 우연히 그가 [서재필]의 증손자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서동성 씨의 부단한 노력으로 [서재필]의 유골이 1994년에 필라델피아지역 웨스트 로렐 묘지에서 한국으로 봉환되어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후 서동성 변호사를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를 통해서 [서재필] 박사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사고무친한 미국 땅에서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해서 경청할 기회가 있었다. 서동성 변호사 얘기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서재필 씨)는 옛날 사람이지만 키도 육척이고 어디 내어놓아도 꿀리지 않을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서동성 변호사)는 키도 이렇게 왜소하고 외모가 처져서, 내가 서재필의 후손이라고 하면 도대체 사람들이 믿지를 않아요."

서동성 변호사는 그 후 독립유공자 사업과 관련해서 한국 정부로부터 수상을 많이 했다고 듣고 있다. 그의 여생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서재필은 비록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혁명의 정신]은 잊지 않았다. 한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독립신문] 발행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6년에 그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하였다.

필자가 미국에서 로스쿨을 마친 것이 1992년 말이었으니, 혁명가 서재필 씨가 미국에 와서 메디칼 스쿨을 마친 해로부터 딱 100년 차이가 난다. 서재필 씨는 약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6개월 만에 일본을 배웠고 미국에 건너와서도 부지런히 노력하여 의사가 되고 또 자신의 [혁명]을 반성하고 분석하여, 그 후에도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쌓았지만, 필자는 그런 [혁명가]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야말로 평범한 보통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필자가 [혁명가] 서재필의 일생에 대해서 가까이서 듣고 (비록 후손인 서동성 변호사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또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더 연구하고 많은 것을 알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가는 필자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혁명]을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혁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조용히 찾아온다는 사실도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다.

이웃에 어떤 할머니가 이사를 왔는데, 필자의 여식들이 다니는 학교의 영어 교사라고 했다. 이 분이 지난 5월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어느 봄날, 따사로운 햇빛을 등지고, 자신의 앞마당에 거대한 우편함을 설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차를 타고 휘익 지나가면서 필자는 처음에는 이 분이 거대한 우편함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무슨 [다단계 판매업]을 부업으로 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그런데 며칠 뒤 자세히 보니 그 우편함 속에는 책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고 [무료 도서관 Free Library]이라고 안내문까지 친절히 적혀있었다. 알고 보니 필자가 [우편함]이라고 착각했던 구조물은 사실은 [도서관]이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이 분의 영향이었는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또 다른 이웃도 이런 도서관을 설치했고 또 좀 있으니 세 번째 이웃이 비슷한 도서관을 열었다. 필자는 이 두 번째 세 번째 도서관을 보면서 갑자기 [이것은 혁명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마당에 [도서관]을 열어 이웃들의 정신건강을 살뜰히 챙길 생각을 했던 이 할머니야말로 어쩌면 [혁명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필자는 갑자기 몸에 전율이 일어남을 느꼈다.

   

필자의 이웃에 들어선 무인도서관 1호.

한 두어 달 지났을까. 할머니는 이번에는 [아동 전용 도서관(Kids Library)]을 열었다. 키가 작은 아이들이 도서관 문에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판단을 내린 후, 그리고 또 어른들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나 전문 서적 따위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아동 전용도서관]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인지, 할머니는 원래의 도서관보다는 좀 작은 규모의 [아동 전용 도서관] 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조그만 [벤치]를 하나 설치했다. 이 벤치는 너무 작아서 필자 같은 어른은 앉지 못하고 3-4세 정도의 아이들만 앉을 수 있다.

   
어른 전용 도서관이 성공했다는 판단이 서자 이번에는 어린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아동 전용 도서관]을 열었고 아이들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 아이들 전용으로 벤치를 놓았다.

필자는 이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혁명]은 아주 조용히 그리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또 전혀 엉뚱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혁명]은 거대한 댐의 한쪽 구석에 생긴,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하기 힘든 균열처럼, 시작은 아주 미미한 것이지만, 그 파장은 크고 오래 간다. 지금 필자의 이웃에는 이런 식의 도서관을 설치한 사람이 적어도 네 가구는 된다. 이런 지극히 보통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핸드폰과 컴퓨터 게임에 찌든 아이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바쁜 이웃 사람들도 책을 통해서 문학과 예술과 철학을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것이 바로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크게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고 [총성]을 울리지도 않았고 [돌멩이]를 던지지도 않았고 [횃불]을 밝히지도 않았고 [피]를 흘리지도 않았지만, 지금 필자의 이웃들에게는 이렇게 조용히 일어난 [혁명]의 파장이 모두의 가슴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달을 필자가 지켜본 바로는 지금 이 할머니의 도서관은 그런대로 성업 중이다. 아이들이 수시로 책을 꺼내고 돌려주고, 어른들의 방문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 필자는 아침저녁으로 이 할머니의 집을 지나면서, [드디어 나도 [혁명]을 보았다!]는 생각에 매일 겸허해지고 있다.

산업 혁명이든, 그린 혁명이든, 아랍의 봄이든, 처음에 이런 혁명에 불을 지핀 사람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이웃에 이사 온 할머니가 평온한 우리 마을에서 이런 [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이라는 사실에 필자는 지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이 집을 지나다가 우연히 아이들이 할머니의 도서관에서 책을 빼가는 것을 목격할 때면, 필자는 [혁명]을 보았다는 생각에, 갑자기 심장에 무언가 느꺼운 것이 찾아옴을 감지하고, 관자놀이에 흐르는 피의 맥박이 빨라짐을 느낀다.

이웃의 도서관 앞에 차를 잠시 멈추고, 혼자 [혁명]을 보았다는 벅찬 감동이 밀려와, 눈물을 찔끔 훔치고는, 눈부신 [혁명]의 현장을 뒤로 하면서, 괜스레 겸연쩍어져, 이유도 없이 라디오를 크게 틀고, 빵빵 경적을 울리며, 이른 아침부터 눈물 젖은 눈에 미소를 짓다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는 기색이 보이면, [혁명]의 현장을 들킨 것 같아서, 갑자기 악셀레다를 밟으며, 등신처럼 화들짝 놀라 출근길을 재촉한 것이 벌써 한 두어 번 된다. 그래, 오늘 아침에 드디어 [혁명]을 보았다! 나는 지금 [혁명]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다!

변우진 (언어 81, 미네소타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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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5)
  바로잡습니다. 변변 2013-09-09 03:55:36
서재필 재단의 웹사이트에 의하면, 1890 년 6 월 19 일 (서재필이 26 세가 되던 해) 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결혼하던 시기에는 그는 이미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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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는 촌락 규모에 맞는 데, 박찬민 2013-09-07 09:40:15
문명이 집단의 규모를 키워, 오랜 세월 축적된 긴장이 순간에 폭발하는 지진처럼, 대량 살육의 비극을 반복해왔습니다. 이제서야 유전자라는 기초와 조화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혁명이 시작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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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XXX.XXX.171)
  찬민 동문이 불현듯 현현 顯現 하시어 담백한 느낌의 선문답 禪問答 을 댓글로 남겨두고 홀연히 가실 때마다 왠지 무언가 또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이 느껴집니다. 변변 2013-09-08 13:42:40
문/이과를 칼자르듯 잘라놓고 이산가족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찬민 동문처럼 이 경계를 생사현관
生死玄關 처럼 드나드는 분들이 있어서 앞으로 세상은 점점 재미있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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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66)
  이런 글을 만날 수 있다니, 축복받은 느낌! 정연진 2013-09-07 02:40:34
잘 읽었습니다. 소수가 읽기 너무나 아까운 글입니다. 수 많은 혁명을 꿈꾸는 혁명가/세력들이 자기자신들의 변화를 꾀하지 않고 사회 외적인 변화만 꿈꾸다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한 마음의 혁명부터 시작하자, 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탁월한 글! 서재필 박사 이야기도 좋은데 전반 후반으로 나누면 더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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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40)
  You are welcome. 별것 아닌 글에 과찬의 말씀을... 이번에 이 글을 쓰면서 [서재필] 에 대해서 더 알게된 것이 큰 수확이었습니다. 변변 2013-09-07 04:46:48
일본 가서 선진문물을 보고온 사람들이 [도서관] 을 지어본다든지 나름의 혁명이 가능했을 것인데 갑자기 외세를 믿고 체제전복을 꿈꾸었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회적인 경륜이 없고 먹물만 먹은 사람들이었으니 민중적인 기반이 약했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다음에 서재필에 관해 또 쓰게 되면 혁명 전/후로 나누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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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66)
  갑자기 제 이름이 튀어나와서.... 이경훈 2013-09-06 00:21:40
잠깐 놀랐습니다. 후배의 일에 이렇게 좋게 평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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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XXX.XXX.36)
  서재필은 어려서는 사서삼경 달달 외워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만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사람들이 주창한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교육에 매료되었습니다. 변변 2013-09-06 06:30:09
혁명이 실패하는 바람에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와서, 미국에서 토론 문화를 배운 후 한국에 가서 전파합니다. 오늘 이경훈 동문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시면 학생들에게 서재필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무려 100 년 전에 이런 시도를 하신 분이 계시다, 그는 진정한 [혁명가] 였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하시면 더 좋겠습니다. 이경훈 후배도 지금 혁명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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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XXX.XXX.31)
  혁명은 참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오달 2013-09-05 22:02:42
깨달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서재필하면 독립신문 정도로 알았고,
갑신정변은 그냥 역사의 한 사건으로 이해했는데,
어디선가 서재필 가족의 역사를 읽고,
혁명가라는 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런 혁명가 덕분에 사회가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실패한 혁명가들에게도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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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XXX.XXX.241)
  영어 용비어천가 혹은 영어 훈민정음 같은 책을 하나 내시면 부제로 [혁명] 같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지 않을까요? 변변 2013-09-06 06:34:33
밥상 혁명, 중딩 공부 혁명도 하는 마당에 무슨 혁명을 못하겠습니까? 선배님도 혁명 함 하세요. 실패하면 어때요. 우리가 다 인정하는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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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XXX.XXX.31)
  변변은 정말 시골에서 살면 안되는 사람이다 워낭 2013-09-05 14:44:06
'혁명'이란 화두로 사람을 이렇게 장엄하게, 그리고 배꼽 빠지게 만들어놓고야 마는 천상의 이야기꾼이 한글도 모르는 백인 천지 미네소타에 산다는 것은 비혁명적이다. 변변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대의 천부의 말글 재주를 코리안을 위해 혁명적으로 구사하기 바란다. 마지막 문단에서 나는 거의 실신 지경까지 갔다. 장쾌한 혁명 그 유쾌한 대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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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XXX.XXX.3)
  실신을 그렇게 쉽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이제 아무리 쓰나미처럼 큰 희열이 찾아와도 실신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요? 변변 2013-09-05 16:27:38
보잘것없는 글 하나 써놓고 이렇게 칭찬을 듣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탈시골 입도회] 심각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더 늦기 전에 혁명 한번 해야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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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66)
  도서관의 혁명 엉겅퀴 2013-09-05 08:40:49
변 선배님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주욱 읽어도 정보는 쏙쏙 감동은 철철.. 명문입니다.
서재필 이 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오해가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풀게 되었습니다.
참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 번의 일생, 어떻게 살 것인가 반성하게 합니다.
"옆집 할머니의 혁명적인 도서관"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하는 혁명, 따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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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XXX.XXX.228)
  혁명이 반드시 피를 철철 흘리면서 해야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변변 2013-09-05 12:51:10
도서관 혁명 캘리포니아에서도 함 시작해보세요. 무슨 일이든지 선구자가 있는 법입니다. 엉겅퀴 님이 선구자가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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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XXX.XXX.31)
  혁명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오고 김종하 2013-09-04 23:40:36
그것을 바로 알아보고 그 혁명의 정신에 동참하시는 변변님도 혁명가이십니다^^
서재필 선생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 잘 배웠습니다. 저도 서동성 변호사님을 10여년전 취재하면서 자주 뵈었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셨지만 한 인물 하시고, 영어도 명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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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XXX.XXX.123)
  보잘것없는 글을 편집하고 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으로 갑자기 [혁명] 에 필이 꽂혀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끝내고 보니 좀 섭섭하기도 하네요. 변변 2013-09-05 07:16:13
서동성 변호사님은 참으로 겸손하신 분입니다. 제가 처음 이분을 만났을 때 [저는 구멍가게 하는 변호사입니다] 라고 본인을 소개해서 겸허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그후도 계속해서 이런 친근한 인상을 주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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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XXX.XXX.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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