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10 월 18:29
> 뉴스 > 에세이
       
아주까리 대궁 ‘장냥깜’ 총은
[오달샘의 추억 기행] ‘할아부지’가 물려준 어린시절의 한 조각
2013년 05월 22일 (수) 18:07:09 김지영 기자 acroeditor@gmail.com
김지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클릭!  

아주까리를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난다. 그리고 “장냥깜” 총이 떠오른다.

풀이라기에는 드세 보이고 나무라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아주까리, 1950년대 60년대 한국의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또랑 “가생이,” 밭 “뚝싱이,” 두엄탕 언저리에서 아주가리 대궁이 쑥쑥 자랐다. 초봄 어린애기 손바닥 같은 여린 잎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여름이 되면 올망종말 노란 꽃이 잎사귀 사이에서 출렁거렸다. 가을이 되면 검게 익은 열매 속에서 알록달록한 작은 차돌 같은 아주까리씨가 툭툭 터져 나왔다.

세월이 가고, 어린 시절도 끝나버렸다. 나는 시골을 떠났고 한국을 벗어났다. 그리고 아주까리는 희미한 기억의 창고 속에 정리되지 않은 잡동사니 속에 묻혀버렸다.

다시 아주까리를 만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로스엔젤레스 북쪽 글렌데일 뒷산을 걸어 올라간 적이 있다. 제법 넓은 소방도로, 그 길가 언덕에서 소담하게 자라는 식물군에 눈길이 갔다. 노란 꽃이 올망졸망, 그리고 검붉은 대궁이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한눈에 아주까리인 것을 알아보았다.

어스름한 산길을 혼자 걷고 있어서였을까? 아주까리를 보는 순간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어릴 적 사진이다. 우리집, 마당에서 마루로 오르는 댓돌이 두세 계단에 서서. 마루 뒤쪽으로 안방 문이 열렸고 그 속에 할아버지 모습이 조금 보인다. 할아버지와 내가 이 세상에 한때 같이 있었다는 유일한 시각적 기록.

근 육십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내 의식의 세계로 슬며시 들어오신다. 나도 슬그머니 옛날로 돌아간다. 나는 다섯 살, 세상 일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한 여름 한 낮 더위가 대단하다. 아랫방, 웃방, 마루하나, 그리고 부엌 -- 긴 네모꼴 초가집이 우리 집이다. 집 그림자가 드리워진 집 뒤란 굴뚝 근처, 거기가 집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다. 그 옆으로 두엄탕, “잔아버지”가 논일 밭일 틈틈이 풀을 베어다 부려놓는 곳이다. 풀을 썩혀서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

두엄탕은 썩는 풀만 있는 곳은 아니다. 그 밑으로는 간장 빛 썩은 물이 고이는 조그만 웅덩이가 생긴다. 거기서 맹꽁이들이 자란다. 개구리보다 좀 크고 둔해 보이는 맹꽁이, “개굴 개굴” 대신 “맹꽁 맹꽁” 운다. 썩은 풀 위로 쑥대도 자라고 명아주도 자란다. 두엄탕 갓으로는 아주까리가 자란다.

한 여름이 지나면 아주까리 대궁이 여물기 시작한다. 대나무처럼 마디가 진 아주까리 대궁은 만지면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잘 드는 낫으로 툭지면 아무 저항 없이 뚝 잘라진다. 

   
아주까리.

할아버지가 당시 내 키의 두 배보다 더 큰 잘 자란 아주까리를 잘라 오신다. 어른 팔 길이 만한 아주까리 대궁. 그 대궁에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 마디 결을 따라 쌀알 두 개만한 구멍, 서로 한자 길이쯤 떨어져서 같은 쪽으로 구멍 두개를 낸다. 그리고 석자 길이의 튼실한 버드나무 가지를 끼운다. 양쪽 끝이 아주까리 대궁 구멍에 낀 버드나무는 팽팽한 활이 된다. 앞쪽 끝에 아주까리 대궁을 관통하는 구멍 두 개를 낸다. 버드나무를 낀 그 쪽 구멍과는 90도로 만나는 구멍 둘이다. 그 구멍에 한치 길이의 작은 나무가지를 끼운다. 버드나무 활끝과 새로 끼운 작은 나무는 대궁 속에서 십자로 만난다.

능숙한 솜씨로 활총을 만드는 할아버지 솜씨가 참 신기하다. 마지막으로 활총 끝머리에 창칼로 쐐기 모양 홈을 판다. 그리고 제법 단단하게 익은 아주까리 한 알을 그 홈에 넣는다. 활총에 탄환까지 장전한 것이다. 그리고 왼 손으로 활총을 잡고, 잘 겨눈 다음, 오른손으로 수평으로 끼워진 작은 나무가지를 뒤로 돌린다. 그 나무가지가 팽팽한 버드나무 가지 한쪽을 밀어올린다. 활끝이 구멍에서 밀려나오는 순간 반원으로 긴장해있던 힘이 탁 튀면서 앞에 놓인 아주까리씨를 날려버린다.

장남감 활총. 그게 내가 맨 처음으로 기억나는 장난감이다. “장냥깜” -- 그건 참 귀한 것이다. 더구나 누군가가 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어 준 것, 그것을 갖는 것은 특별한 기쁨이다. “할아부지”와 나는 그해 여름 그렇게 둘이서 보낸다. 다른 식구들이 들일을 가시고, 이제 노동력마저 상실한 할아버지와 아직 농사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집안에서 놀 수밖에.

그 때 할아버지는 70을 눈앞에 둔 노인이셨다.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큰 아들인 나의 아버님은 군인 가서 소식이 없고, 집안에는 큰며느리 우리 엄마, 그리고 아직 장가들기 전의 작은 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말수가 적으셨지만 나에게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양반 집안의 장손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셨을 게다. 기억나는 것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급제를 하셨다는 이야기. 그 급제를 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큰 삼촌도 급제를 하셨다는 이야기.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그 할아버지의 아버님의 작은댁이 집안 살림을 송두리째 싸들고 이사를 가버렸다는 이야기. 할아버지 말씀은 항상 그때 남의 집으로 실려 간 족보를 찾아와야 한다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 말귀를 알아듣기에는 턱없이 이른 어린 손자에게 그런 말씀을 열심히 하셨던 할아버지, 아마도 시간의 순리를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겠지.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겹치는 시간이 오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싶다.

할아버지는 그후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들어가기 전에 돌아가셨다. 동네 유일한 서당에 나를 보내 놓으시고 첫 날 손자의 보고도 듣지 못하고 가셨다. 할아버지께 그날 배운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을 자랑하려 했는데…

아주까리를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장냥깜 총이.

왜 총이었을까?

할아버지는 1887년 생이시다.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참 어려운 세월을 보내셨다. 청일 전쟁, 노일 전쟁, 그리고 한일 합방, 태평양 전쟁, 해방과 육이오. 할아버지가 어릴 때 보았던 것들 중 군인들이 쏘는 길다란 총이 가장 신기했을 터이다. 어른들 흉내를 내며 전쟁놀이도 했을 것이다.

그 때 충청도 땅에 흔히 있던 아주까리 대궁 장냥깜 총이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된 다음에 어린 손자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한 조각 떼어준 것이 아주까리 대궁으로 만든 총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국에는 아주까리라 설 자리가 없어졌다. 두엄탕 같은 게 없어진지는 오래이고, 마을 뒷산, 앞산, 그리고 도로가에도 과일나무, 아니면 꽃나무들을 심었다. 할아버지의 기억도 기억의 현장이 사라지며 더욱 희미해진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아주까리 활총, 소중한 기억속의 장냥깜이다.

내가 할아버지가 되면, 나는 어린 손자에게 무슨 장난감을 만들어 줄까?

   

ⓒ 아크로폴리스타임스(http://www.acropolistime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쓰기
이름 비밀번호
제목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현재 0 byte/최대 400byte)
전체기사의견(12)
  끊이지 않는 좋은 인연들 엉겅퀴 2013-05-23 09:00:50
할아부지와 손자가 함께 보내 시간, 참 소중하시겠습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조상님 모두는 결국 내 몸안에
계시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오달님 어린 시절 장냥깜이 되었던
그 아주까리도 오달님 따라 글렌데일에 와 있었을 줄이야!
추천0 반대0
(216.XXX.XXX.228)
  할아버지 모습이 오달 2013-05-23 15:40:35
제 사촌들 그리고 그들의 아들 딸에게서
가끔씩 보입니다.
그리고 제 딸내미 얼굴에서도.
참 긴 끈이지요.
추천0 반대0
(108.XXX.XXX.45)
  염화미소 Shin 2013-05-22 21:11:55
:)
추천0 반대0
(98.XXX.XXX.91)
  염화 시중의 미소 오달 2013-05-23 15:41:32
영어로는
Flower Sermon이라고 하더군요.
추천0 반대0
(108.XXX.XXX.45)
  선배님도 총 만들어 주시면 되겠네요. 변변 2013-05-22 12:16:42
우리 인간에게 마지막 남는 것은 결국 memory 인 것 같습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192)
  우리 세대가 오달 2013-05-23 15:43:27
뭘 맹길줄을 몰라서
뭔가 사주어야 하겠지요.

기억이 곧 존재이지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들을 보면,
그들의 인생에서 사라져가는 과거가 떠오릅니다.
추천0 반대0
(108.XXX.XXX.45)
  아! 그렇군요!! 엉겅퀴 2013-05-24 09:42:59
저 또한 뭘 맹길줄 모르는 세대에 속하네요.ㅠㅠ
나무를 깎든지 지푸라기 공예를 하든지,
더 고차원으로는 요리를 하든지 길쌈을 하든지
해야 할 터인데요. 지금부터라도 해야겠습니다.
추천0 반대0
(216.XXX.XXX.228)
  오달님께도... Kong 2013-05-22 06:18:06
제겐 늘 대선배님 또는 선생님이셔서 오달님께도 저렇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납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장난이 아니셨네요.
옷 입으신 걸 보니 보통 집안이 아니셨나봐요.^^
추천0 반대0
(99.XXX.XXX.185)
  아직도 순정이 오달 2013-05-23 15:44:34
남아있습니다.

몰락한 집안이라도 장손 프레미움이 있어서
가끔씩 호사를 할 때도 있었지요.
추천0 반대0
(108.XXX.XXX.45)
  꼴랑치기 김종하 2013-05-22 01:20:58
아~ 어릴적 기억의 편린... 그 옛날 집앞 골목길, 동네 친구녀석들과 '꼴랑치기'하며 놀던...(꼴랑치기는 구슬치기의 사투리) 당시는 온통 흙길, 발 뒤축을 땅에 대고 빙빙 돌아 구멍을 1미터 정도 간격으로 여러개 내고 구슬을 던져 넣어 가며 해가 져 캄캄하도록 놀았었는데. 구슬이 없으면 아주까리 따서라도...
오달님 어릴적 사진에 슬그머니 미소가 납니다^^
추천0 반대0
(107.XXX.XXX.123)
  우리는 오달 2013-05-23 15:48:59
다마치기라고 했는데
나중에 다마가 일본말인 걸 알았지만.
가끔씩 아주까리 씨를 먹고 배가 아파하는 아이도 있었고,
알고보니 아주까리가 ricin이라는 맹독성 프로틴을 함유한다고,
최근 누군가가 ricin이 묻은 뭐를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있지요.
추천0 반대0
(108.XXX.XXX.45)
  저희도 김종하 2013-05-23 21:14:56
다마치기라고도 했죠. 주로 구멍없이 놀 때. 구멍 있음 꼴랑
추천0 반대0
(107.XXX.XXX.123)
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3600 Wilshire Blvd., #1214 LA, CA, 90010, USA|Tel 1-818-744-100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경훈
Copyright since 2009 by The Acropolis Time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Editor@acropolis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