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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끝이 없음을 알 때 자유함 얻어
'예수는 없다' 오강남 교수 문자주의와 종교의 성장을 말하다
2012년 07월 24일 (화) 16:27:00 이원영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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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로서 종교간 상호 이해와 올바른 신앙관을 제시하는 데 앞장 서고 있는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명예교수)가 지난 20일부터 3일간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향린교회와 새길교회 주최로 신앙 강연회를 가졌다. 오 교수는 문제작 ‘예수는 없다’를 비롯해 ‘세계 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등 10여권의 저술을 통해 극단적인 신앙관을 경계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제시함으로써 종교의 아카데믹한 분석과 영성을 함께 모색한 이 분야의 선구적 개척자로 인정받고 있다. 아크로를 통해 오 교수의 강연 소식이 알려지자 참석하지 못하는 많은 독자들이 지상 중계를 해달라는 요청을 아크로 편집진에 전해왔다. 21일 향린교회(담임 곽건용)에서 열린 ‘종교, 심층에서 만나다’란 주제의 강연 내용을 요약, 지상중계한다. <정리=이원영 기자>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오강남 교수

 

종교(신앙)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습니다. 종교가 표층에 머무를 때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를 발생하게 됩니다. 종교가 표층에서 심층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종교가, 신앙이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이웃 종교와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종교가 심층으로 발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는 “21세기의 기독교는 심층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가(기독교가) 표층에만 머무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종교가 심층적이 된다는 이야기는 보고 느끼는 시야가 넓어지고, 신앙의 울타리가 커져간다는것을 뜻합니다.  제가 자주 예를 드는 개구리 얘기입니다.
개구리가 우물 안에만 있을 때는 그 안이 자신의 모든 세계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주위로 보이는 넓이가 세상의 넓이고, 위로 보이는 동그란 하늘이 하늘의 전부로 인식하겠지요.  이 개구리에게 땅은 광대무변하고, 하늘은 끝도 없이 넓다는 것을 아무리 말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의 세계는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구리가 일단 우물 밖으로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훨씬 넓은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던가를 느끼게 됩니다. 개구리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변화된 개구리’가 되는 것입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믿던 시절에는 두려움 때문에 배를 타고 멀리 나가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에는 끝이 없고 지구는 둥글고, 아무리 배를 타고 멀리 가도 떨어지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항해가 무척 자유로워졌습니다. 바다에 끝이 있다고 믿었을 때에는 끝까지 몇 마일이나 될까, 바다끝에 갔다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을 것입니다.  종교에 비유하자면 표층 종교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비슷한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 바다는 끝이 없는데도 끝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는 수준의 물음, 그런 질문에 머물러 있는 신앙의 단계는 표층 신앙, 표층 종교라 하겠습니다. 마치 병을 고치는 훨씬 나은 치료법이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옛 처방을 맹신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표층에서 심층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발전하고 성숙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심층 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며,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자주의’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절대자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 절대자는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절대자를 문자로, 개념으로 규정하고 절대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문자와 인식으로 규정되는 절대자는 절대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언어, 문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려야 합니다.

선불교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여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감정을 ‘사랑’이라는 단어에 담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오묘한 사랑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문자에 모두 담을 수 있다면 사랑에 감염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설레고 아파하고 감동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 문자에 다 담아 버리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사랑 그 자체와 ‘사랑’이라는 문자의 차이입니다.

   
향린교회에서 열린 신앙 강좌에서 청중들이 오강남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오 교수는 '예수는 없다'는 책과 관련,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 여기 오신 분들은 읽지 않다도 된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책의 제목만 보고 불온하다며 읽지 않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오교수는 강의가 끝난 뒤 질의 응답 시간을 통해 "기도는 탄원기도만이 기도일 수 없다. 팃낫한 스님이 말한 mindfulness(마음다함)도 기도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그런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생활 속의 기도다. 북미 기독교는 문자주의에 머물고 있다. 문자주의는 신도들을 컨트롤 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제는 심층체험의 민주화가 가능해진 시대다"고 말해 표층 문자주의 종교의 한계가 임박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체험을 문자에 담을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문자의 한계성이 명확한데도 우리는 문자에 사로잡혀 허상을 좇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문자에 갇히는 순간, 실체는 죽어 없어집니다. 바로 그것이 문자주의의 함정이자 비극입니다.

티모시 프리크와 피터 갠디가 공저한 ‘웃고 있는 예수’는 문자주의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한 명저로 꼽힙니다. 이 책은 성경은 문자주의자들이 제각각 쓰고 해석한 것으로 온전한 ‘신의 말씀’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종교적 독단을 가르치는 시대착오적인 문자주의에서 벗어나 영지주의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자주의 종교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았는지 이 책은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심층 종교란 또 ‘아-하(A-Ha)’ 의 연속을 경험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오고, 다시 산으로 오르면서 그에게 보여지는 세상을 보며 ‘아-하’를 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심층 종교는 깨달음의 지경이 끊임없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심층 종교, 심층 신앙이 되어가는 과정은 ‘신나는 것’입니다.

문자주의의 시각에서는 성경의 절대성을 나타낸 구절로 흔히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구절을 인용합니다. 문자주의적 해석으로는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고백적인 말’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말하는 본인(예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나, 우리 모두에게 있는 자아로서의 ‘나’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을 때, 그 말은 정말 이것 저것 다 조사해서 정말로, 객관적으로 가장 예쁘다는 말을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고백’을 전하는 ‘문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말을 놓고 가장 예쁘네, 그렇지 않네 하고 따지거나 해석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은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생각과 통하는 말입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몸나’를 신앙을 통해 ‘얼나’로 거듭나게 한다고 말한 데서도 찾을 수 있고,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사인여천(思人如天)’을 말한 동학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문자주의의 대표적인 폐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자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었을 정도로 치열했습니다. 문자주의는 무조건 믿으라는 맹신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문자에서 어긋나게 되면 배척하고 갈라집니다.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는 이유입니다.

결국 문자주의에 사로잡힌 표층 종교는 싸우지만 심층 종교는 싸우지 않습니다. 심층 종교는 다원성을 인정하고 서로 협력합니다. 배타주의가 스며들 여지가 없습니다.
종교가 심층에서 만나면 더 많은 이들에게 깨달음과 진리를 전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의기투합 합니다. 옳고 그른 잣대도 필요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개인의 신앙이 표층에 머무를 경우, 그리고 그것이 진리의 모든 것이라고 믿을 때 신앙의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그 단계, 그 수준에서 진리의 정점에 온 것처럼 인식하고, 그 인식의 틀에서 타종교를, 타인을 재단하게 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행복하면 된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가 밖에 나와 이전의 세계관을 부끄러워 하듯 신앙의 지경도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신앙의 심층화, 신앙의 성숙을 위한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다의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항해의 자유함을 얻었듯이, 신앙의 성숙 또한 그런 것입니다.
(오강남 교수의 강연은 향린교회 웹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http://www.goodneighborhood.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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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5)
  좋은 강연, 명쾌한 정리 김성수 2012-07-24 14:53:03
저도 금요일 저녁에는 참석했었는데, 차분한 강연회였습니다. 아쉽게 토요일에 못갔다 싶었는데, 역쉬~~ 깔끔한 정리, 감사!
추천0 반대0
(75.XXX.XXX.158)
  정리해주셔서 쌩유!! 곽건용 2012-07-24 09:02:32
강의 녹음은 위에 적혀 있는 향린교회 홈피에 올라와 있습니다. '향린방송'에 들어가보시면 다 있습니다. 박찬민 동문의 수고 덕분에.
추천0 반대0
(76.XXX.XXX.140)
  '나'는 '자아로서의 '나'라고 하셨는데 박봉현 2012-07-24 07:37:38
어렵습니다. 내 안에 신이 있다는 것과 내가 신이라는 것은 다른 것 아닌지요? 제가 성당에 가서 성체를 모실 때 신을 모시는 마음으로 하지만, 성체를 모신 내가 곧 신이 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몸나, 얼나로 설명을 하셨습니다만,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추천0 반대0
(38.XXX.XXX.253)
  워낭 정리 쌩큐 오달 2012-07-24 00:22:01
가지 못해 아쉬웠는데 정리 좋았습니다 .
글 만 보아도 a-ha moments가 많네요.
추천0 반대0
(97.XXX.XXX.0)
  '예수는 없다'는 제목에 대해 이원영 2012-07-24 00:02:31
청중 중에서 한 분이 질문을 했는데 오 교수는 '(우리가 생각하는)그런 예수는 없다'로 하길 원했으나 출판사에서 그러면 책이 안 팔린다며 막무가내로 그런 제목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제목 때문에 정작 읽었으면 하는 분들이 제목만 보고 읽지 않아서 아쉬움이 크지만 나름대로 알려지는 데 도움도 됐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이 꼭 읽었으면 하고 강추하는 책입니다.
추천0 반대0
(71.XXX.XXX.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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