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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마음이 찾아드는 그 곳은
[송호찬의 시 사랑] 김태정 시인의 "달마의 뒤란"
2011년 10월 06일 (목) 17:49:08 송호찬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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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서해고속도로를 타고 들어가면 할머니 젖무덤 같은 편안한 구릉, 문을 활짝 열고 반기는 윤선도의 고택, 땅 끝으로 벋은 산줄기가 낳아 놓은 두륜산과 달마산, 그 품에 안긴 대흥사와 미황사, 그저 여느 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이 ‘남도답사 일번지’임을 느끼게 합니다. 이 해남은 두 명의 시인을 낳습니다. 고정희 시인과 김남주 시인. 두 사람은 칠팔십 년대 저항 시인의 큰 발자국을 남기고는 모두 쉰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납니다.

   
해남 달마산 미황사

 

두 사람이 떠난 해남 땅은 한 명의 시인을 맞습니다. 시인은 서울 생활을 접고 달마산 미황사 아래에 홀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시를 씁니다. 오늘은 김태정 시인의  ‘달마의 뒤란’을 읽어 봅니다.

달마의 뒤란
                           김태정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덟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아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릴 듣는

해남하고도 송지면 달마산 아래
늙고 헐거워져 편안한 윤씨댁 뒤란은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고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뜨고
간장 된장이 익어가고
누렁이 밥 먹는 소리
천지에 꽉 들어차고

 

우주의 티끌이 모이는 곳. 무량의 시간이 지나고도 남아 있는 우주 생성의 반향 같은 작은 떨림까지도 모아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가는 곳. 어미의 자궁입니다. 떠난 후 젖먹이 짐승은 늘 뒤돌아보지만 그 좁은 곳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찾는 곳은 헐거워진 자궁 같은 자리. 세상을 폭풍처럼 살고 난 후, 표류하는 영혼은 어머니 자궁처럼 헐거워진 뒤란을 찾아 삶의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습니다. 다시 태아처럼 시간도 마음도 놓아버리고 웅크려 앉으니, 그 뒤란에는 나 자신과, 차랍차랍 누렁이 밥 먹는 소리와,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이 꽉 찹니다. 그러기에 달마의 뒤란에는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오늘밤이 오늘밤 같지 않고, 어제가 어제 같지 않고, 내일이 내일 같지 않을 것입니다.

김태정 시인은 이렇듯 헐거워진 자궁 같은 달마산 아래에서 농사짓고 시를 쓰고 살다가 지난 구월 마흔여덟의 나이에 우주의 티끌로 돌아갑니다. 등단한 지 십삼 년이 되는 해에 펴낸 한 권의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남기고.

송호찬 (기계설계 80ㆍ변리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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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4)
  장독대의 추억 홍선례 2011-10-07 18:37:13
어린 시절, 영등포 역 앞, 정원이 넓은 우리 집엔 장독대가 있었지요. 고추장, 된장, 할머님이 담그신 장맛은 일품으로 소문나 동네 사람들에게 퍼주시는 인심 때문인지, 우리집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장독대 옆엔 꽃들이 만개하고 그 옆엔 진도개 쟉크가 낮잠을 자던 한가로운 여름 날이 기억납니다. 시인 송호찬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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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24)
  영등포 역 앞에요? 송호찬 2011-10-09 22:06:25
지금의 영등포 역 앞 모습만으로는 잘 그려지지 않지만, 그런 집이 있었네요. 저로서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때의 모습을 한 번 글로 그려주신다면 저희의 기억이 더 풍성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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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같이 잔차를 오래 탔음에도 박변 2011-10-07 14:48:50
시인이라 해서 난 국문과 출신인 줄 알았는데 공대 출신에 변리사라니...놀랍습니다. 좋은 글 반갑고 좋은 시들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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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30)
  감사합니다. 송호찬 2011-10-09 22:01:28
열심히 쓰겠습니다. (가장 아픈 데를..... ㅎㅎㅎ) 저는 누구든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예술가가 되리라 생각한다면...... 이 부분에서 가장 와닿은 것이 소설가 김영하의 TED 강의였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ja-8sYjNaY 박선배님 그림을 보니 벌써 예술가시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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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오달 2011-10-06 13:40:30
갑자기 나네요.

누렁이 검둥이 그 정겨운 이름들이
워리 메리 낮선 소리로 바뀌어 가던 때
충청도 차령재 무성산 자락에서
고단하게 조용하게 흔적없이 다녀가신
우리 외할머니.

송시인님 덕분에 한 오십년 뒤로 돌아가보았습니다.

고정희 시인도 해남 출신이군요.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목숨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때때로 머리속에 떠오르는 고시인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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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XXX.XXX.72)
  아, 공주 산골 마을 송호찬 2011-10-06 23:35:31
마음속으로 잠깐 다녀왔습니다.
제가 실제 태어난 곳도 공주 산골 마을이거든요.
전근 많이 다니신 아버지 덕에 잠깐 살았던 곳이지만요.
거의 도시에서만 살았기에 뒤꼍은 늘 할머니댁 산아래 뒤꼍만 생각납니다.
장꽝이 있고, 감나무가 있고, 불 때면 굴뚝 틈새로 연기가 나오고,
겨울이면 동치미가 묻혀 있고, 바람에 시누대 서걱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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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장꽝 오달 2011-10-07 09:53:02
참 오래간 만에 들어보는 말이네요.
장꽝, 시늉만 있는 굴뚝은 어느 집이나 다있고,
감나무는 그래도 좀 잘사는 집에나 있었지요.
겨울 살얼음 속에서 꺼내는 동치미,
그 땐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동치미 몇개 꺼내가도
다 그러려니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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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XXX.XXX.72)
  맞아요, 장꽝 종하 2011-10-07 11:50:23
장독대가 장꽝이었죠. 고향 뜬 후 이런 향토말도 까맣게 잊고 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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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31)
  렌즈 이충섭 2011-10-06 09:41:58
배경복사처럼 뉴트리노처럼
온 우주에 편재하는 생기를
촛점에 '자'로 응축해 내는
렌즈...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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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25)
  그러니, 거기서 나온 우리 송호찬 2011-10-06 23:08:20
모두가 소중하지요.
가끔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의 기본이
파동이라면 얼마나
많은 파동이 중첩되어야
사람이 될까하고요.
그러기에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인 것이지
하는 생각...
덕분에 자유로운 생각 벋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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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아침마다 아스피린처럼 눈이 시리도록 하얀 영상을 우리 머리 속에 쏙쏙 집어넣어주시는 시인을 접한다는 것은 분에 겨운 축복입니다. 변변 2011-10-06 06:18:12
시인의 이력만으로도 시가 됩니다. 송호찬, 기계설계, 변리사, 시인. 이 네개의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의 살아온 길과 고뇌와 환희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온 길이 곧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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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XXX.XXX.180)
  어이쿠 몸둘 바를....감사합니다. 송호찬 2011-10-06 23:12:13
즐겁게 열심히 글 쓰겠습니다. 가을 단풍이 들 때가 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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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아~ 우리집 뒤란에도 김종하 2011-10-06 01:15:43
자그마한 장독대가 있었지요. 어릴적 그곳에 서면, 외할머니가 열어 새끼손가락 찍어 맛보던 간장독, 코 속으로 가득 퍼지던 짭조롬한 내음과 나른한 오후 햇빛에 졸리던 기억... 오늘 하루도 지친 마음이 찾아들 수 있는 그 곳이 바로 먼 기억 속 품안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란'이 집 뒤 울타리 안 '뒤울안'의 준말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차랍차랍' 누렁이 밥먹는 소리도 정겹고. 정말 우리말의 깊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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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204)
  우리말을 사랑하시는 쫑님의 댓글 송호찬 2011-10-06 22:58:51
차랍차랍... 차랍차랍...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확 끌어 당긴 것이 이 '차랍차랍'이었죠.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누렁이가 밥먹는 차랍차랍 소리가 후렴구처럼 귀에 맴돌았어요. 개밥그릇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고요. 곧 한글날입니다.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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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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