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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신의 '소리'를 듣고 깨우치는 것
[삶과 영성] 내 생을 굽이치게 만든 사건과 깨달음
2011년 07월 27일 (수) 14:59:47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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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누구의 삶도 인위적으로 만든 고속도로나 운하처럼 일직선으로 곧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평생을 살면서 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과 사건들이 한 사람의 삶을 크고 작게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굽이친다’는 말을 별 이유 없이 좋아하는데 이런 사건과 사람들이 한 사람의 생을 굽이치게 만들지요. 사람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크게는 가치관이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작게는 습관이나 말하는 방식이나 버릇 같은 것들이 달라집니다. 곧 이런 일들이 생에 있어서 크고 작은 전환점이 된다는얘기입니다.

저도 한 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제 삶의 전환점이 된 사람들과 사건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를 말씀하려 합니다. 그 일은 20여 년 전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일어났습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에 목사가 되겠다고 작정하고 졸업 후 곧바로 신학교를 갔는데 그 학교가 한국에서 손꼽히는 보수적인 신학교였습니다.

그때 제 신앙은 기도원으로 산기도, 철야기도 다니면서 나무뿌리 붙잡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주여, 주여’ 외치며 철야기도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신학교가 별 문제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사정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야기도는 철야기도대로 열심히 했지만 그래도 저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성의 동물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는데 당시 그 신학교 분위기는 이성 가진 사람이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억압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억압적인 분위기였지요. 게다가 그 학교에서 얘기하고 가르치는 ‘신학’이란 것이 학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교리학습’ 또는 ‘교리주입’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를 휴학하고 3년 동안 혼자서 도서관에서 신학 책을 읽는 데 몰두했습니다. 과연 신학이란 학문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런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제 생애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때였습니다. 거의 고시 공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지내고 나니 이젠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신대학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가 1985년이었습니다. 한신에 머물던 3년 동안 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스승님들과 벗들을 만났습니다. 그 스승님들 중 한 분 안병무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됐고 다른 한 분 홍근수 목사님은 병상에 누워계십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받은 감화와 영향은 말로 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그 시절 두 분과의 만남과는 별도로 제 신앙과 신학사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스스로 깨달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특정한 사람이나 책에서 직접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스스로’라는 말을 붙여봅니다. 저 자신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그 동안 읽은 여러 좋은 책들에서 영감을 받아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갖고 있던 질문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이 과연 누구냐?’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과연 이 하나님은 구약성경에 적혀 있는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셨을까? 이 하나님은 정말 홍해를 갈랐고 이스라엘더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을까? 정말 그랬을까? 바로가 말을 안 들으면 바로의 장자만 죽일 일이지(그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왜 이집트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의 장자를 죽여야 했을까?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리고 그 일들이 야훼 신의 명령에 따라서 일어났다면 과연 나는 이런 신을 믿어야 하나? 이런 질문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이 정말 다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은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습니다. 그런 기적이 지금 다시 일어난다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제 신앙에는 아무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제 신학적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제 관심은 정말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에 있었습니다. 정말 이집트의 장자들을 다 죽였을까? 정말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을까? 정말 다윗 같은 사람을 왕으로 선택했을까?

다만 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이런 질문들로 괴로워할 때 때 제 영혼을 파고들어온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신명기 4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호렙에서 너희 하나님 야훼 앞에 섰던 날, 야훼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을 나에게로 불러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할 말이 있다. 이 백성은 땅에서 사는 동안 언제나 이 말을 따라 나를 경외하는 길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을 자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산기슭에 나와 서자 그 산은 하늘 한가운데까지 치솟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음산한 구름이 덮여 캄캄한데 야훼께서 불길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지 아무런 모습도 보지 못했다. 다만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너희에게 선포하신 것은 당신의 계약이었다. 그것은 곧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신 열 조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두 돌판에 새겨주셨다.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서 지킬 규정과 법규를 너희에게 가르쳐주라고 그 때 야훼께서 나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깊이 명심하여라. 야훼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일체 어떤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16절)


왜 이 말씀에 꽂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좌우간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이 말씀만 생각하고 또 생각한 날도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을 준 이유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너희가 그 날 아무 모습도 보지 못했으니 그러므로(therefore)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형상을 만들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형상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신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을까요? 이집트에서나 메소포타미아에서나 당시에 최고의 문명을 이뤘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상을 매일 닦고 광내고 화려하게 입히고 심지어 음식까지 만들어 바쳤지만 그들도 자기들 손으로 만든 신상이 곧 자기들이 믿는 신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떤 형태로든 신이 신상 안에 현존하고 있다고 믿긴 했지만 이들도 자기들 눈으로 신을 보고 본대로 신상을 만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신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불가분리의 관계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때 제가 주목한 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거나 그렇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목소리를 들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신의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목소리만은 들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꿩이고 목소리를 듣는 것은 닭인데 꿩 대신 닭이란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이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듣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목소리 뒤로 당신의 모습을 감추셨다는 얘기입니다. 이 분이 구약성서의 야훼 하나님임을 저는 그때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앙은 내 영혼을 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
   
하나님은 사람이 직접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말씀하리라 믿는다. 그것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닐까.

저는 지난 주간에 <예수는 없다>를 쓴 오강남 교수님을 만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 교수님은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평생 비교종교학을 가르치고 은퇴한 분으로서 몇 년 전에 쓴 <예수는 없다>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최근에 <종교, 심층을 보다>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이 책은 여러 종교와 사상을 대표하는 60명의 삶과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책입니다. 오 교수님은 이 책 머리말에서 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했습니다.

표층은 말 그대로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고 심층은 표층 아래 깊은 곳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종교의 다름을 막론하고 표층에 머물러 있을 뿐 심층이 이르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명기 4장을 읽으면서 깨달은 점을 오 교수님의 심층종교와 연결시켜 생각해봤습니다. 지금부터 3천여 년 전 인근 최고 문명권의 사람들이 모두 신상을 만들어 거기 절하고 그것을 섬길 때 신상을 만들지 말고 다만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하는 종교는 가히 ‘혁명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렇게 명령한 신은 가히 혁명적인 신이었고요.

그러면 이 ‘목소리’ 또는 ‘말’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말은 그저 잠시 허공을 울리고 사라져버리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은 그 어떤 실체(substance)를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목소리는 눈에 보이는 신상 못지않은 실체입니다. 말은 잠시 허공을 울리고 사라질 수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깊숙이 박혀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상 안에 현존하는 신이 아니라 목소리에 현존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눈에 보이는 신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닦고 광내고 화려하게 입히고 걸진 음식을 먹이는 것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따르고 믿고 섬기는 유일한 방식은 야훼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방식은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일차적으로 목소리를 듣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것이 그리 분명하지도 명백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언어로 말씀하실까요? 히브리어? 영어? 한국어?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른 언어로 말씀하실까요? 히브리인에게는 히브리어로, 미국인에게는 영어로, 한국인에게는 한국어로 말씀하실까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들이 곧 하나님의 목소리일까요? 이집트의 장자를 죽이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목소리였을까요?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목소리였습니까?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사람이 직접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그 언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언어를 해석해내는 것이 곧 사람의 신앙이고 깨달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람의 신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 내 영혼을 때렸을 때 어떻게 그것에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물론 그 중에는 잘못된 깨달음도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우리는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힘을 기울여 반응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네 신앙이고 삶이며 실천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구약성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이스라엘이 어떻게 알아듣고 해석하고 반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목소리로 해석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해석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였든지 그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해석이었든지는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만 좌우간 구약성경에는 가나안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담겨 있습니다. 그로부터 3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구약성서를 읽고 있는 저의 해석은 물론 그들의 해석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해석이었고 우리가 반드시 그 해석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 사십 년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제가 식별한 하나님의 음성은 이런 것들입니다. 해방, 자유, 평등, 평화, 더불어 삶, 공동체, 책임, 자비, 긍휼, 그리고 사랑……. 저의 신앙은 이런 하나님의 목소리를 제 영혼이 어떻게 튕겨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곽건용<사회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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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36)
  곽선배님 질문이요 스피노자 2011-08-09 07:21:10
히브리어에 God (신의 일반적인 지칭)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나요? 야훼, 엘 샤다이 같은 구체적인 표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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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XXX.XXX.77)
  '엘'(EL)이 일반명사 '신'에 해당됩니다. 곽건용 2011-08-10 21:49:06
그것의 복수형이 엘로힘이구요. 이 복수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복수 gods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단수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복수로 쓰는 경우죠. 구약이 복수를 썼을 때는 대부분 후자의 의미지만 가끔 전자의 의미로 쓸 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때는 야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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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여러번 읽어보아야 할 것 같고 그러고 싶은 글입니다. 박진임 2011-07-30 21:07:28
형상이 아니고 소리이군요. 그러니 어렵지요.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다보니 조금만 어렵다싶은 얘기를 해도, 예를 들어주세요, 그림을 보여주세요. 하는데...영에 관한 이야기이니 얼마나 어려울까요. 신의 소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소리도 받아들여지고 해석되기는 천가지 만가지.오랫만에 많은 생각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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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XXX.XXX.191)
  아이쿠, 박진임 님 댓글이네요... 곽건용 2011-08-02 15:39:43
신의 소리를 사람들이 천 가지로 해석하니 이렇게 문제가 많겠죠. 그래도 어쩝니까,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제 신학교 교수님 중 한 분은 딴에는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노력하시는데 그 예가 더 헛갈리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교수님, 제발 예는 들지 말아주세요." 라는 '항변'을 학생들에게 듣곤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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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82)
  그렇겠네요 박진임 2011-08-06 20:19:46
날아가는 나비를 잡아서 곤충 표본을 만드는 순간, 나비는 나비이기를 멈추어버린 것인가요?(밤이 늦어 댓글 달고 있습니다). 진작에 여쭈어보고 싶었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 다녀도 됩니까? 여기와서 알게된 좋은 친구 두 명이 다 거기 가자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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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XXX.XXX.191)
  신을 찾아서 이충섭 2011-07-28 09:21:58
'굽이친다'... 들을수록 생각할수록 싱싱하게 살아 펄떡거리는 뭔가가 느껴집니다.
일직선 운하... 굽이치는 용을 쎄멘공구리로 옷입혀 튀기면 볼 수 있는.. 그게 그래서 그렇게 불편했었나요?
미꾸라지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하고 뜬 구름 같기도 사기 같기도 하고 가끔씩 그럴 듯하기도 한..
그게 바로 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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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25)
  가끔씩은 그럴 듯하기도 한 신이라.... 곽건용 2011-07-29 09:07:39
미꾸라지 같을 때는 미꾸라지라고 보면 될 것이고, 안개나 뜬구름 같아 보일 때는 그렇게 보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가장 의심스러울 때는 가끔씩 그럴 듯하게 보일 때??? 어, 이거 아니었는데... 이렇게 그럴 듯하면 안 되는 건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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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78)
  목소리의 해석과 반응 이상희 2011-07-28 05:23:33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자기의 언어로 해석하고 반응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네요. 행동하는 영혼 곽건용선배님의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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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XXX.XXX.124)
  몸뚱이는 가만히 있고 곽건용 2011-07-29 09:03:47
영혼만 행동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깊이 반성하고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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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78)
  구약에 나오는 야훼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스피노자 2011-07-27 23:32:46
유대인들은 실제로 야훼라는 존재와 마주쳤고 사막에서 수십년을 같이 보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야훼가 아담을 만든 신인지, 노아를 구한 신인지, 아브라함을 시험하고 축복한 신인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낸 신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각자가 같은 신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이런 역사적 사건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특별한 종교로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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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XXX.XXX.254)
  글 부제가 잘못됬네요 스피노자 2011-07-28 01:16:27
"신앙은 이해못할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보는 것이 아니고 '소리'를 듣는 것" 이라고 했어야 되는데. 어떻게 보면 글 내용과 완전 반대의 뜻의 제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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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XXX.XXX.254)
  스피노자 님... 곽건용 2011-07-29 09:05:27
잘 지내시나요? 큰비에 피해는 없고? 제목이 글의 내용을 반영하느냐보다는 낚이는 제목이냐가 중요한 거 아니겄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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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78)
  덕분에 잘 있습니다 스피노자 2011-08-09 07:08:31
I will make you pfishers of men이라고 누가 말씀하지 않았나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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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XXX.XXX.77)
  구약에 나오는 광야의 신인 야웨 하느님과 연변 2011-07-27 18:20:05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같은 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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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XXX.XXX.71)
  그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냐에 달려 있겠죠. 곽건용 2011-07-27 20:21:54
제가 이 글/설교에서 말하고 싶은 건 구약성서라는 '글자/문서'가 광야의 신을 다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 '광야의 신'이 아무리 난폭하고 이기적이고 저차원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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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보이지 않는 신으로 말미암아 신학이 생겼겠지요. 신이란 무엇인가.. auramon 2011-07-27 16:00:08
신이 있는가 없는가.. 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커다란 돌덩어리 우상을 숭배해버리면 그만인 원시종교는 신학이 필요 없었겠지요.
유일신의 등장 이후 누가 신의 뜻을 옳게 읽었는가 하는 문제로 모세도 나오고 선지자들과 구약이 생겼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신관, 신의 뜻 해석을 따르는 자들 아닌가요? 구약은 배경, 참고자료, 부정확한 역사기술이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다들 나름대로 신의 뜻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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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XXX.XXX.61)
  스스로 읽어보려고 노력들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더 나은 무엇이 있나 auramon 2011-07-27 16:06:56
찾으려는 오만방자한 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무조건 믿슘니다 하는 무식한 종교가 아님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달린 것은 모자나 쓰라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라고 있는 것이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오강남 선배식의 표현으로는 우리 각자가 예수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문자에 매이지 알라는 것이니, 예수님 가르침 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 .. 내 말도 그냥 믿지 말고,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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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XXX.XXX.61)
  글자에 갇혀 있는 예수는 곽건용 2011-07-27 20:19:03
곧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금으로 만든 신상 속에 갇혀 있는 예수나 글자 속에 갇혀 있는 예수나 그게 그거.....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영으로 사는 사람도 그와 같다.... 우리가 글로 아는 예수가 예수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물론 글자를 믿는 게 안전하지요. 하지만 신앙의 길이란 본래부터 모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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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오달 2011-07-27 15:19:16
솔직한 해설자 겸 인도자 건용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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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XXX.XXX.72)
  기독교 역사를 보면 곽건용 2011-07-27 15:30:49
신의 뜻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고 행동하던 사람들과 그것은 절대 알 수 없다고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강남 교수의 표현을 빌면 표층 기독교인과 심층 기독교인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후자라고 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뒷전에 물러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명상과 수도생활과 평화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경의'는 부담스럽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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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91)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스피노자 2011-07-27 23:26:34
라고 주장하는 경우 대부분은 인간의 말이지 하느님이 말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요. 말해줘야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정도 밖에 안되면 이래저래 하느님의 말과 인간의 말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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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XXX.XXX.254)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권병 2011-07-27 14:16:30
하나님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지고한 사랑의 목소리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이고, 그 말을 믿어주고, 그 말대로 따라줄 수 있는 것은 진정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일 것입니다. 짝사랑은 아무런 열매가 없어요. 짝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는 순간은 정말 황홀할 것 같아요. 그 황홀함을 많은 분들이 체험하면 참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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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196)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곽건용 2011-07-27 15:19:12
사랑의 목소리로 들었다면 그렇게 들은 사람 맘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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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91)
  사람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때가 많은데... 이권병 2011-07-28 19:59:10
신의 목소리를 모두 알아듣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요.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쉽게 그리고 수도 없이 반복했다는 것은 알아요...^^ 못 알아듣게 이야기하신 것은 우리가 몰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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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33)
  교회의 구약 공부중에 야훼의 뜻을 꿰 맞추려는 스토리에 뇌가 과부화되고 뭔가 목에 걸린 둣 힘겨워하고 있었는데 윤금자 2011-07-27 12:00:29
목사님 글을 읽으니 수긍이 가고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보여준다는 풀이로 제 숨통이 트이지만 우리가 그 해석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말씀엔 다소 머뭇거려 지기도... 요즘 모임의 주제이기도 해서 십계명을 자주 화두로 떠올리는데, 다윗으로 하여금 십계명 무려 다섯 개나 범하게 만든 Bathsheba의 이름은 과연 그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지 성경기자가 갖다붙인 이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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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생각엔 성경기자가 남자라서 밧세바에게도 일말의 책임을 물으려는 쪼잔한 의도로 해석됩니다. 윤금자 2011-07-27 12:17:12
저를 더욱 혼동시키는 것은 열왕기 이후 구약 어느 부분에서는 아예 다윗과 밧세바 사건을 언급조차 안하고 넘어가는데 그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인 성경이 이토록 쓰여지는 걸 허용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 일까요? 사람의 신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 내영혼을 때릴 때 어떻게 해석해 내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내가복음' 쓰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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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금자 씨 댓글이니 친절하게 답해야쥐... 곽건용 2011-07-27 15:04:07
바울의 말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의 뜻을 '고정된 문자'에 국한시키면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만으로!'는 당시 상황에 비춰서 이해하지 않으면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성경 이외의 여러 전통과 교리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란 뜻이지 성경의 글자에 포로가 되라는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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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금자 씨 댓글이니 친절하게 답해야쥐... (2) 곽건용 2011-07-27 15:08:19
심지어 루터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빼고 싶어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란 원칙을 거스른다고 해서 말이죠. 그 다음으로, 성경의 저자가 남성이란 얘기는 이렇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2-3천 년 전에는 여자들은 글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고 심자어 남자들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그랬습니다. 그러니 성경 대부분은 남자가 썼고 그래서 남자의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게 사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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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91)
  '친절한' 금자 씨 댓글이니 친절하게 답해야쥐... (3) 곽건용 2011-07-27 15:11:44
성경을 읽을 때 그런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담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비단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이 직접 쓴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중에서도 남자들이 썼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게 성경을 바로 읽는 데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성경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영감을 얘기할 때 요즘 생각 있는 신학자들이나 신도들이나 그걸 '글자'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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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금자 씨 댓글이니 친절하게 답해야쥐...(4) 곽건용 2011-07-27 15:15:18
성경이 기록됐을 때뿐 아니라 지금 누군가가 그것을 읽을 때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죠. 그런 의미에서 '내가복음'을 쓰는 걸 반드시 '우'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누구나 다 '내가복음'을 씁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나'란 사실을 누가,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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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91)
  '내가복음에' 대해 그토록 긍정적 확대 해석을 내려 주시니 친절하다고 불린 금자씨 2011-07-28 15:49:51
머리속이 안 복잡한 단순녀의 얼굴에 급화색이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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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금자 씨 댓글이니 친절하게 답해야쥐...(5) 곽건용 2011-07-27 15:18:15
다만 그 '내가복음'이 옳으냐 그르냐는 그 해석이 누구를 위한 해석인가, 얼마나 보편적인가,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자가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 있겠죠. 사족으로, 성경의 밧세바 얘기는 역사적 사실은 아닐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 얘기 시작 직전과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중간에 밧세바 얘기가 없어도 얘기가 이어진다는 사실은 아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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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91)
  많은 깨닫음을 주십니다 김성수 2011-07-27 10:10:42
훈장님의 말과 글을 통해 많은 깨닫음을 얻고 있습니다. 말보다 글솜씨가 더 훌륭하다는 느낌이... 저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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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43)
  말로 먹구 사는 사람에게 곽건용 2011-07-27 14:59:09
이게 왠 치명적인 말씀... 목사 노릇 그만 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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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신앙에 대해서 고민과 묵상을 한 분만이 표할 수 있는 이원영 2011-07-26 22:14:04
정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름이 쫙~끼칠 정도로 와닿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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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26)
  무더운 여름에 소름이 잠시라도 곽건용 2011-07-27 14:58:19
쫘 끼쳤다면 그런대로 이 글은 할 일은 한 셈일까요? ㅎㅎ 신앙은 무엇을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처셔' 그런 믿음을 갖게 됐느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내 나이 30대 초중반, 나름 심각했을 때였지요. 날 되돌아보면 살면서 많은 게 달라졌는데 그 즈음에 갖게 된 생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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