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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흑조가 마음껏 춤추게 하라
[삶과 영성]영화 '블랙스완'의 두번째 이야기
2011년 06월 17일 (금) 14:20:32 곽건용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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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2
출애굽기 32:1-6 로마서 5:20
   
영화 블랙 스완 포스터.

본래 사람에겐 어두운 구석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것을 먹으면 그날로 죽는다는 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훔친 사과가 더 맛있고 금지된 것이 더 하고 싶은 법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원죄’(original sin)를 지었고 ‘타락’(fall)했습니다.

이 ‘타락’과 ‘원죄’이라는 말은 모두 선악과 사건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신학적, 교리적 용어들로서 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용어입니다. 성경이 쓰인 때보다 훨씬 뒤에 신학자들이 선악과 사건을 이해한 개념이고 그것을 규정한 용어들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용어들이 선악과 사건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을 타락이나 원죄라는 안경을 통해서 읽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주객이 전도된 셈인데, 만일 여러분이 이 안경을 벗고 선악과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 3장을 읽으면 상당히 다르게 읽힐 것입니다.

원죄와 타락이 선악과 사건을 설명하는 좋은 용어와 개념은 아닐지라도 이 사건은 사람에게는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성경이 이 어두운 면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도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이런 어두운 면, 곧 성경이 ‘죄’라고 부르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후 “정말 좋구나!”하고 감탄하셨던 바로 그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정말 좋구나!”라는 감탄사를 터뜨리게 했던 그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은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영원히 추방당한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더 이상 “정말 좋구나!”라는 하나님의 탄성을 터뜨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어두운 면, 곧 ‘죄’라고 부르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뱀이 하와로 하여금 억지로 선악과를 따먹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유혹했을 뿐, 하와에게든 선악과에게든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물론 뱀에게는 손가락이 없지만 말입니다. 뱀은 “저걸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단다.”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기에도 좋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하와는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궁극적인 책임을 뱀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람이므로 그것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도 사람이 책임지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선악과를 따먹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본래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구가 그것이지요. 그 욕구가 사람 안 어딘가에 잠재해 있다가 뱀의 유혹을 받았을 때 겉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어두운 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행복하고 불행한 영혼

성경과 함께 인류의 중요한 정신적 유산 가운데 하나인 인도의 <바가바드기타>는 행복한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순결하다. … 그는 자애롭다. 그는 정욕을 통제할 수 있다. … 그는 정직하고 진실 되며 항상 평온하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 그는 욕심이 없다. 그는 부드럽고 겸손하다. 그는 필요치 않는 행동을 억제한다. … 그는 용서하며 인내할 줄 안다. … 그는 증오와 자만심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품성은 하늘이 부여한 권리이다.

반면 불행한 영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들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자제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진실도 순수도 바른 행실도 없다. … 그들의 욕망은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그들은 거만하고 허세를 부리며 자만심에 빠져있다. … 그들은 생의 유일한 목적이 감정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근심으로 괴롭힘을 당하며 죽음만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근심과 걱정이 그들을 백 가지 족쇄로 얽어매어 욕망과 분노로 향하도록 채찍질한다. 그들은 쉴 수 없이 바쁘며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정직한 행위를 계속 쌓는다. …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자들이어서 많은 욕망으로 인해 안절부절 하며 미망의 그물에 갇혀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외부에 과시하기 위해 이름뿐인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 … 지옥에는 세 가지 문이 있다. 욕망과 분노와 탐욕의 문이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패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행복한 영혼과 불행한 영혼을 이렇게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서술하는 구절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런 게 있다면 내용은 <바가바드기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렇지 않을까요? 행복한 영혼이 따로 있고 불행한 영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두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적으로 복되기만 한 영혼도 없고 전적으로 불행하기만 한 영혼도 없습니다. 행복한 영혼이라고 해서 절대로 불행해질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불행한 영혼이라고 해서 행복한 순간이 없지는 않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둘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모두 있습니다. 성인(聖人)이라고 해서 감각적인 쾌락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이라고 해도 선해지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얘기 한 도막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얘기, 곧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붙들어 예수에게 데려온 군중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제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 얘기’라고 말하지 않고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붙들어 예수에게 데려온 군중들 얘기’라고 말씀한 데 주의해주십시오.

그들은 돌멩이를 버리고 사라졌다

율법은 간음을 저지른 남녀 모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합니다. 그들을 성문 밖으로 끌고 나가서 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이 첫돌을 던지고 다음으로 나머지 주민들이 돌을 던지게 되어 있지요. 군중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하나를 끌고 예수께 와서 “모세의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이 기대한 바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의 법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지도 않고, 모세의 법은 야만스러운 구시대의 유물이니 그것을 지킬 필요 없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첫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기가 막히는, 아니 기가 뻥 뚫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님다운 말씀입니다. 군중들은 저마다 돌멩이 하나씩 들고 여차하면 누군가를 향해 던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돌멩이 맞을 사람은 여인 아니면 예수,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모세의 법대로 시행하라고 말하면 여인에게 돌멩이질을 할 것이고, 모세의 법은 구시대의 유물이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예수님에게 돌멩이질을 할 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군중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군중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나둘 씩 돌멩이를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 등등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여자 아니면 예수, 둘 중 하나를 돌멩이로 쳐 죽이고 말겠다고 몰려들었던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첫 돌을 던져라.”라는 한 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너뜨렸냐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여인 아니면 자신을 향해있던 군중들의 증오와 폭력의 시선을 그들 자신에게 돌려놓았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됩니까? 예수의 말씀이 잠자던 그들의 양심을 일깨웠다고도 말합니다. 정말? 과연 그럴까요? 그것으로 다 설명이 됩니까?

영화 <블랙 스완>에서 니나는 ‘백조’로서는 흠잡을 데 없지만 관능적이고 고혹적이고 파괴적인 매력을 표현해야 하는 ‘흑조’를 연기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감독 토마스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흑조를 연기할 ‘잠재력’이 그녀 안에 있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녀 안에는 흑조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날개를 펴고 춤추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는 니나가 그 잠재력을 밖으로 끄집어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지만 흑조의 날개를 펴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연습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여기에 흑조의 매력으로 철철 넘치는 릴리가 등장합니다.

릴리는 ‘범생이’ 니나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도록 이끕니다. 그녀를 ‘타락’시킨 것이지요. 그러자 니나 안에 잠재해 있던 흑조가 아주 작은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완전한 날갯짓이 아닙니다. 그녀 안의 흑조를 완전히 깨워 관능적이고 고혹적으로 춤추게 하는 것은 시끄러운 클럽에서 모르는 남자들과 몸을 부비거나 마약을 하거나 동성애 행위를 하는 것 등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안의 흑조를 완전히 깨운 것은 환상 속에서 깨진 거울 조각으로 릴리를, 실제로는 자신을 찔렀을 때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흑조의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그리고 흑조를 완벽하게 춤춘 다음에야 비로소 그녀의 백조로서의 춤도 완벽해질 수 있었습니다.

흑조가 춤춰야 백조도 춤춘다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첫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했을 때 군중들은 하나둘씩 돌을 내려놓고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군중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을까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서 왜, 어떤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첫돌을 던져라.”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내심 ‘설마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돌 던질 녀석이 있겠어…….’라거나 ‘네 놈들도 모두 똑같은 녀석들 아니냐? 네 놈들이 양심이 있다면 감히 돌을 못 던지지…….’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정말 군중들에게 돌을 던져보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 안에 있는 흑조의 날개를 건드린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흑조가 관능적이고 고혹적이고 파괴적으로 제대로 춤춰야 비로소 백조가 우아하고 아름답게 춤출 수 있음을 예수님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돌멩이를 내려놓고 사라진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백조가 서서히 날갯짓을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죄 문제로 염려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도 그는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들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그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치 죄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로마서 7장이 좋은 예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19-24절)

그는 죄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선을 행하려 하지만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는 자신 안에 죄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람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죄가 바로 니나 안에 웅크리고 앉아 춤추지 않는 흑조라고 봅니다. 바울이 이토록 처절하게 울부짖는 까닭은 그것이 춤추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만 있기 때문입니다.

춤추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흑조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흑조가 너울너울 춤을 춰야 백조도 춤을 춥니다. 이를 바울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빛을 보려면 어둠의 극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이 보이는 법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지점, 죄를 짓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지점까지 가봐야 비로소 은혜의 빛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란 말씀입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어두운 면은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것을 그냥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백조의 가능성과 흑조의 가능성 모두를 갖고 있는 니나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사실은 자칭 타칭 신실한 기독교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해서 이 사실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천성(天性)이 바뀌지는 않음을 우리는 끝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죄를 두고 씨름했던 바울에게서 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흑조가 나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교과서적인 아름다움만 표현해서는 좋은 무용수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무용수는 관능적이고 고혹적이고 파괴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흑조도 춤출 줄 알아야지, 백조만 춤출 줄 알아서는 좋은 무용수가 못 됩니다.

사람은 절대 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의 죄인 됨에 눈뜹니다. 니나에게는 환상 속에서 릴리와 싸우면서 깨진 거울조각으로 자신을 찔렀을 때가 그때였습니다. 사람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확실하고 든든하고 견고하다고 느꼈던 것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황량한 벌판에 홀로 벌거벗고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고 무릎 꿇을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의 천정이 열리고 영원의 별빛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흑조가 춤출 때 마음껏 춤추게 내버려두십시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지 않습니까! 흑조가 마음껏 춤춰야 백조도 아름답게 춤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흑조와 백조의 춤이 조화를 이뤄야 <백조의 호수>는 아름다운 무용극이 될 수 있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네 삶에서도 흑조와 백조의 춤이 조화를 이뤄야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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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24)
  신이 선악과를 생명수와 함께 인간에게 주고 양민 2011-06-21 07:46:41
하나를 먹지말라고 했지만, 인간이 그 걸 먹지 않으리라고 신이 순진하게 생각지는 않았으리라.
사춘기 자녀가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고 부모가 순진하게 믿지는 않는다.
자녀가 시도하는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려는 시도는 결국 성공해야하고 비로소 부모는 아이를 어른이 되어간다고 인정한다. 인간이 신의 "선"에만 머물려하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성숙"이라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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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21)
  자녀 안의 흑조를 죽여 없애려 애쓰면 양민 2011-06-21 07:53:02
그의 성숙을 더디게 만들 뿐이다. 신의 의도를 잘 못 이해하면, 내 자신이 어리석은 신이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법의 뒤에 법정신이 있듯이.. 정의의 뒤에 긍휼이 있듯이.. 내 흑조를 잘 쓰다듬고 백조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을 줄 알게될때, 남 안의 흑조도 보듬을 수 있게되고, 그리고 그이 백조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추천1 반대0
(75.XXX.XXX.121)
  대체로 동의하는데... 곽건용 2011-06-21 14:11:36
신과 사람의 관계를 부모와 사춘기 자녀로 비교한 것은 좀 거시기 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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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지가 양민 2011-06-21 14:31:25
더이상 신에게 달리지 않고 인간에게 달린 것 처럼,
사춘기 자녀가 어디로 튈 지가
부모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녀에게 달려있는 것과,
거시기는 해도, 비교할 만큼 비스므레 하다고 생각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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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0)
  사춘기 자녀들의 호칭 이충섭 2011-06-22 09:11:29
일단 "하느님 아버지" 라고들 하니 양민님의 비유가 와 닿네요.
하지만 철기시대를 살고 있어도 인류의 철들기 아직 가망 없으니,
당분간 신께서는 "하느님 아빠" 라는 호칭에 만족하셔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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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25)
  특이한 모습 이상희 2011-06-20 15:47:02
인기를 좇지 않는 모습,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그렇게 연약한 모습을 실명 그대로 아크로에 드러내는 곽건용님의 모습은 특이할지 모르지만 참 존경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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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XXX.XXX.13)
  부끄부끄 곽건용 2011-06-21 14:12:45
이럴 때 쓰는 말, 맞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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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곽건용 2011-06-20 13:25:08
모든 사람은 흑조의 춤도 추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춤도 아름답게 춰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흑조의 춤과 백조의 춤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춤의 아름다움은 완성된다. 이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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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글은 읽히기를 기대하고 쓰는 거고 말을 들리기를 기대하고 하지요 곽건용 2011-06-20 13:11:32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또 그 말하는 걸 처음부터 글로 쓰다보니 한 번 쓰고 그냥 버리기 아까워 흔적을 남겨두곤 해왔습니다. 그게 흘러흘러 아크로에까지 왔습니다. 제 글/설교에 대해서 이견을 갖고 있는 분이 왜 없겠습니까. 어딘가에도 쓴 적이 있지만 제가 아직까지 이른바 '주류'에 끼어본 적이 없어서 제 말과 글에 대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사람보다는 좌우로 움직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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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하지만 곽건용 2011-06-20 13:15:32
아크로에 올라온 글에는 독자들이 거의 다 안면이 있는 분들이어서, 그리고 건전한 댓글 문화를 강조하는 매체여서 제 글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목소리 높여 반대하신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로 표현된 댓글이 전부는 아니란 생각은 늘 하고 있고, 가급적 독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단 생각은 늘 합니다. 물론 글로만 만나는 사이에서는 오해의 소지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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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모든 말과 글에는 작자와 독자 간에 합의된 기본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기본전제는 곽건용 2011-06-20 13:22:41
'제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친다 라는 바울의 말을 인용했을 때 그 말 뜻을 '그러니 죄를 많이 지을수록 좋다. 은혜도 넘칠 테니까...'라는 뜻으로 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전제가 공유되지 않았다면 그건 제가 말/글을 잘못 한 데 첫째 이유가 있겠죠. 근래 들어 제일 맘에 드는 설교/글이었는데 제 기대만큼 읽는 이의 마음에 가 닿지 않은 거 같아서 한 마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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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20)
  흑백 1 이충섭 2011-06-20 08:41:41
백조:은혜 = 흑조:죄 ...
백조=은혜 : 흑조=죄 ...

오랜만에 보는 수학식이라 반갑긴 하지만,
곽건용님의 글에서도 영화 블랙 스완에서도
삶을 그렇게 단순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저는 읽습니다.

“교과서적으로 춤추는 백조의 아름다움”이 꼭 은혜로 연결될 것도 아니고,
“관능적이고 고혹적이고 파괴적인 흑조의 매력”이 꼭 죄를 낳으리라
보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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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25)
  흑백 2 이충섭 2011-06-20 08:45:43
신이 창조한 이 무한 우주 또는 인생을 (국정)교과서적으로만 표백시킨다면
그건 신의 전지전능을 코웃음하는 신성모독이 되지 않을까요?

관능, 고혹, '파괴적인 매력'... 이런 것들 또한 신께서 니나에게 선물한
정정당당한 것들인데 그걸 무조건 죄로 먹칠, 덧칠해버린다면
그건 신을 삼류 국민윤리교사로 쪼그라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실은 상대의 씨앗 품은 채 서로 꼬리를 문 채 돌고도는 음양 같은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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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225)
  내안의 흑조를 깨달아야 양민 2011-06-17 12:05:33
비로소 내안의 백조가 더욱 날개 짓을 할 수 있다...
내안의 흑조를 깨닫지 못하면, 내안의 백조는 깨달음 없는 날개짓만을 하는 불완전한 백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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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XXX.XXX.7)
  흑조가 있어야 오달 2011-06-17 10:12:02
백조가 가려지죠.
죄가 없는 세상이라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많은 교회와 사역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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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XXX.XXX.150)
  흑조와 백조를 능동적으로 선택할 자율의지가 없을 수도 윤금자 2011-06-16 23:50:09
지나고 보니 흑조였던 때. 모르고 지은 죄도 있습니다. 인생에서 흑조와 백조는 동시에 공존할 수 없고 시간차로 존재하고, 그 공연 기회를 주는 것은 선택이지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죄 넘치는 곳에 은혜 넘친다고 하셨는데, 은혜가 꼭 죄와 고통의 도움을 받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죄로 인한 고통이 있는 곳에서 여러가지 색채의 은혜가 발견되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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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135)
  흑조와 백조가 선택의 문제는 아니란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곽건용 2011-06-17 08:45:30
둘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거죠. 죄 넘치는 곳에 은혜도 넘친다는 말을 바울은 무슨 뜻에서 했을까요? "은혜가 꼭 죄와 고통의 도움을 받아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 죄로 인한 고통이 있는 곳에서 여러가지 색채의 은혜가 발견되는 것일 뿐"이라면 왜 바울은 굳이 그렇게 말했을까요? 죄/고통과 은혜가 별 상관관계 없이 공존하는 것일뿐이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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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인간 세상의 고통과 죄악의 문제를 곽건용 2011-06-17 08:51:01
신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다루는 것을 신정론(theodicy)라고 하죠. theos는 신이고 dike는 정의(justice)입니다. 신정론의 여러 이론 가운데 결국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가 재난을 가져왔다는 이론이 신을 가장 잘 변론해준다고 합니다. 제 질문은 왜 사람은 이 자유의지를 갖고 선악과를 따먹었느냐는 겁니다. 안 따먹었을 수도 있는데... 자유의지 이전에 뭔가가 있지 않았겠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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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인간 세상의 고통과 죄악의 문제를 (2) 곽건용 2011-06-17 08:55:39
물론 창세기 3장은 실제 태고적에 실제로 일어난 얘기를 적은 게 아니라 성경을 적은 사람들의 신학적 사고를 얘기로 풀어낸 거죠. 다들 알고 있을 테니 이런 얘기는 할 필요 없겠지만... 제가 명실상부한 댓글 2위인데 (ㅎㅎ) 오랜만에 긴 댓글 달았습니다. 하긴 설교하면서도 교인들에게 '오늘 얘기는 잠시라도 졸면 들으나마나 뭔 말인지 모를 거'라고 '경고'하고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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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글이란 암만 길어도 하려는 얘기를 다 할 수 없고 곽건용 2011-06-17 08:56:51
암만 짧아도 하려는 얘기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말이 실감납니다. 진지한 댓글, 감사합니다. 신앙은 고민의 연속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고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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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삶은 흑과백이 따로 노는 흰(검은)땡땡이무늬인지, 잘 블렌드된 중간색인 그레이인지... 윤금자 2011-06-17 17:00:44
색체계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빛의 삼원색을 합치면 흰색이 되고 색의 사원색을 섞으면 검정이 되지요. 즉 선과 악 등등 의미를 부여하기 전부터 흑과 백은 이미 근간으로 존재합니다. 신앙이든 경험, 수양이든 그간의 변화를 거친 중년의 우리 인간의 삶은 여전히 흑백이 분리되어 내재하는 것인지, 이미 섞여 우중충하지만 세련된 회색인지요? 후자로 마음이 기울지만 불교색채가 나 크리스챤으로서 맘이 편치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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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135)
  여러분의 흑조가 마음껏 춤추게 허하라 이원영 2011-06-16 21:30:20
하시는 말씀에서 굉장한 위안을 얻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는거죠? 고교 시절 '미칭게이'라는 별명의 모 교사는 학생들에게 나쁜 짓해도 된다, 주말에 회개하면 된다, 이렇게 가르치며 그 자신도 몹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곤 했습니다. 물론 비유는 적절치 않지만, 필자의 글은 우리 같이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큰 위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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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74)
  설교를 포함해서 무슨 말을 할 때는 곽건용 2011-06-17 08:38:33
전제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통된 사고의 기반을 갖고 있고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전제 말입니다. 이 글의 전제는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니 맘껏 죄를 짓자'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전제죠. 그리고 아무리 선하고 정의롭게 살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 때가 많다고 인식한다는 전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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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112)
  이 말/글은 곽건용 2011-06-17 08:40:47
그런 전제 위에서 행해졌음을 이해해주십시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 위안은 그가 완벽해지려 안간힘을 쓰지만 글렇게 되지 못할 때 필요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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