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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부릅뜨고 세상의 이치를 깨쳐야 한다"
[역사편지] 불운했던 독립운동가 큰아버지가 아버지에게
2010년 09월 10일 (금) 10:23:48 임유 기자 Editor@Acropoli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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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철들면서부터 큰아버지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산계열 독립운동을 하셨지만 육이오 전쟁 중에 돌아가셨답니다. 오랜 세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대한 얘기마저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했던 아픈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가족사인지라 조심스럽지만, 마침 ‘역사편지 쓰기’라는 좋은 취지에 공감하여 용기를 냈습니다. 늘 형님을 그리워하셨던 부친에게 누가 되지 않기만을 소망합니다. 큰아버지께서 막내였던 저의 부친에게 편지를 쓰셨다고 가상해 보았습니다. 편하게 읽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리산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밝다. 저만치 산 아래 민가에서는 때 아닌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 오르고 있다. 열 식구 주린 배를 채울 요량으로 아끼고 아껴 둔 마지막 씨감자를 삶고 있는 것일까, 문득 집 나간 아들의 새벽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을 엄니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다. 어느덧 연기는 한숨이 되어 흩어지고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식민의 땅 반도의 끝자락을 오른다. 내일이면 나의 고단했던 스무 해 대장정이 끝날지도 모르겠다. 건곤일척의 싸움, 적의 숨통을 끊어 놓을 대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불퇴전의 각오만이 필요할 뿐, 죽음 아니면 죽음… 다만, 다만… 아, 모든 것이 너무도 그립다!!! – 1945년 2월 10일, 지리산에서]

보고픈 막내 성이에게

지난 해 봄이었던가. 그놈의 징글징글한 고문에 온몸이 짓이겨진 채로 집에 들어 갔을 때 너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보고 한동안 먹먹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구나. 그리고 말이야, 명색이 내가 큰형인데 우리 성이가 어엿한 국민학생이 된 지도 모르고(이번에는 급장이 되었다지, 장한 일이다) ‘학교는 언제 들어가니?’ 하고 물었었잖아. 사실을 알고 나서는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단다. 그래도 우리 착한 막내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짓무르고 곪아터진 이 형의 팔다리에 연신 된장만을 발라 주었는데 말이야…

아, 내 사랑하는 동생!

형은 그때, 왜 일본 순사에게 맞았는지를 묻는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단다. 평화롭게 사는 우리네 땅에 갑자기 쳐들어 와 죄 없는 사람들 가두고 때리는 것도 모자라 피죽 끓일 쌀 한 톨 남김없이 가진 것 모두 다 강탈해 가는 일본놈들에게 ‘조선에서 물러가라’고 했을 뿐인데, 발로 짓이기고 온몸을 비틀더니 급기야 내 살점을 태웠다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또 다시, 형은 왜 맞고만 있었느냐면서 당찬 우리 성이가 두 주먹 불끈 쥘 것이 불 보듯 뻔했거든. 그 길로 당장 달려가 일본놈들 면상에 돌팔매질이라도 해 버리면 또 어떡하나 솔직히 걱정도 됐고 말이야. 피는 못 속이는 법이거든, 하하.

이제는 우리 성이가 3학년이 된다지. 아직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칠 수는 없겠지만, 아홉 살 정도면 ‘왜 나라를 잃었으며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는지’ 쯤은 알아야 할 나이라고 이 형은 생각한다. 나라 잃은 백성은 숨쉬는 것조차 사치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형의 마지막 부탁을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구나.

‘자나깨나 학업에 정진할 것!’ ‘조선의 남아로서 자긍심을 잃지 말 것’ ‘나라 잃은 치욕의 역사를 한시도 잊지 말 것’ ‘모든 이에게 자애로울 것’… 못 배운 민족은 나라를 빼앗겨도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 모르는 법이다. 지난 35년의 세월 동안 우리 백성들은 몰라서 당했고 무식해서 맞았단다.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의 이치를 깨쳐야 한다. 끝내는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사즉생의 각오’, 이것이 형의 처음이자 마지막 바람이다.

형은 이곳 저곳으로부터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음을 듣고 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분명 해방된 세상이 올 것이다. 이제껏 형은 총과 칼로써 일본과 대적했지만 어떤 이는 돈으로 해방을 도왔고 또 이마저도 없는 장삼이사들은 간절한 기도로 일본의 패망을 재촉했단다. 독립을 위한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거다. 모두가 한 뜻으로 해방된 세상을 꿈꾼다면 언젠가는 독립이 오지 않겠니?

오늘밤 형은 제국주의 일본의 숨통을 끊어 놓기 위한 빛나는 전투를 시작할 생각에 잠 못 이루고 있지만, 너는 조선을 구할 ‘면학의 전투’로 인해 잠 못 이루어야 한다. 해방된 조국이 저만치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구나. 성아, 만 백성이 기뻐 춤추는 해방된 세상, 조선인의 힘으로 건설될 대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느냐?
나의 자랑, 내 사랑, 우리 막내 성아! 씩씩하게 크기를…기도하마.

너의 큰형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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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기사의견(13)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선정 2010-09-12 20:25:21
임유 선배님의 다른 모습을 보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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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97)
  해방된 조국은 왔는데... 강국 2010-09-12 14:18:50
그 아까운 젊음들은 어찌할까요.
님의 글, 가슴 먹먹하고 안타까운 슬픔으로 읽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임유님의 큰아버지 같은 분께 빚을 지고 삽니다
김광석의 회귀라는 노래가 겹쳐집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mBI&articleno=5028611&categoryId=31®dt=20100519123055#ajax_history_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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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XXX.XXX.87)
  짜릿한 슬픔 홍선례 2010-09-10 23:54:18
임유님 글을 대하며 가슴 한 구석에서 짜릿한 슬픔이 솟아 납니다.
우리 모두의 염원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날을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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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16)
  우째 이리 잘 쓰노? Payton 2010-09-10 21:28:38
진정 가슴이 말하는 글은 언제나 뭉클하다.
추천0 반대0
(24.XXX.XXX.56)
  난 말이야... 임유 2010-09-10 22:38:41
사실, 느낌이 오질 않아.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이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 수 있지? 또 어떻게 하면 그 질기디 질긴 고문의 공포를 이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산(mountain)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난 말이야...잘 모르겠어. 단지, 큰아버지와의 추억을 물을라 치면 맨 '산송장' 얘기 뿐이면서도 가슴 깊이 묻어둔 '자랑'으로 붉은 눈물이 멈추질 않는 우리 아부지한테 그리운 엽서 한 장 배달하고 싶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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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94)
  임유님의 피끓는 글 워낭 2010-09-10 15:51:26
여러번 읽었습니다.결연함, 견결함, 원대함, 강인함, 다정함....님의 심장을 보는 듯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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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XXX.XXX.123)
  하기 어려운 이야기...그래서 더욱 와 닿는 김성수 2010-09-10 13:37:53
가족간의 대화 속에 우리 민족 슬픈 역사의 교훈을 풀어내고 있네요. 임유님은 이참에 전문 작가로 새출발함이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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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
  아 어서 양민 2010-09-10 12:41:44
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북녁에 계신 우리 친척들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추천0 반대0
(99.XXX.XXX.181)
  아버님도 큰아버님도 임유 동문도 변변 2010-09-10 12:34:43
모두 우리 한민족의 융성에 일조를 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형통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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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2)
  일송정 푸른 솔 그 분 엉겅퀴 2010-09-10 08:33:25
나라 잃은 백성은 숨쉬는 것조차 사치...
만 백성이 기뻐 춤추는 해방된 세상...
'선구자'의 주인공, 바로 그 분이시네요.
만 백성이 기뻐 춤추는 해방된 세상, 참 좋겠네요.
추천0 반대0
(99.XXX.XXX.225)
  작가의 소질이 다분하십니다 sierrabird 2010-09-10 08:09:12
상상력도 풍부하시고 지리산의 산악지대에서 싸우는 항일투사의 기백이 여실히 보이는것 같습니다 앞으로 백여회는 더 쓰실수있는 저력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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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XXX.XXX.56)
  면학의 전투 Five Moons 2010-09-10 05:33:03
이 말이 꽃이네요. 전투를 하듯 공부를 해서 조선을 구하는 데 쓰는 사람보다 조선을 담보로 자신의 영달을 위해 쓰는 사람들이 더 많았죠. 아담 스미스 식의 논리에 의하면 모두가 자기 구제를 하다보면 전체의 선이 된다고 하지만... 조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렸던 선현들의 피가 "대한의 미래"의 세멘트가 된 사실을 잊지맙시다. 임유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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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XXX.XXX.141)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들을 수 있었던... 임유 2010-09-10 08:19:06
말하기 힘든 가족사입니다. 술자리에서는 가끔씩 입에 올리던 얘기였지만, 무엇에 꽂혔는지 글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송고 후, 솔직히 후회가 되어 반환을 부탁드릴까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암튼, 뜻으로 읽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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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XXX.XXX.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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